재발가 막내 아가씨의 첫 한마디제2화
이 화는 약 2029자. 본 사이트에서는 제1~3화를 미리 읽을 수 있습니다.
저 계약서에 무슨 수작이 숨어 있는지는 목차만 훑어봐도 훤히 보였지만, 내가 굳이 나서고 싶지는 않았다.
전생에서는 사건 때문에 밤을 새우다 과로사를 했다.
그래서 이번 생에는 조용한 벙어리로 살고 싶었다.
집안이 망하면 망하는 거고, 정 안 되면 신탁기금이나 좀 챙겨서 시골에 내려가 농사나 지으면 그만이었다.
나는 계속 고개를 숙인 채 큐브를 돌렸다.
딸깍, 실수로 한 칸을 잘못 돌리는 바람에 큐브가 캐시미어 카펫 위로 떨어졌다.
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쥐 죽은 듯 고요한 회의실에서는 유난히 크게 느껴졌다.
모두의 시선이 순식간에 내게 쏠렸고, 아빠의 눈에는 짙은 짜증과 실망이 스쳤다.
오빠도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다가온 언니는 허리를 굽히고 큐브를 주워서 내 손에 쥐여 주었다.
“채윤아, 착하지? 밖에 휴게실에 가서 놀래?”
말투는 아주 부드러웠고 나를 나무라지도 않았다.
심지어 주머니에서 박하사탕 하나를 꺼내서 껍질을 벗긴 뒤 내 입에 넣어 주기까지 했다.
“언니가 여기 일이 있어서 그래. 여기 있으면 아빠한테 방해돼.”
언니가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눈빛에는 화 대신 그저 쓸모없는 것을 바라보는 듯한 연민만이 담겨 있었다.
이것이 손씨 집안 사람들의 교양이었다.
그 사람들은 나에게 소리를 지르지도 않았고, 때리거나 함부로 다그치지도 않았다.
하지만 가장 다정한 모습으로 나를 이 집안의 중심에서 조금씩 떼어 냈다.
이때, 고연준도 다가오더니 몸을 낮추면서 나와 눈높이를 맞췄다. 그리고 흠잡을 데 없이 자애로운 미소를 지었다.
“막내 아가씨, 말 들으세요.”
“밖에 제일 좋아하시는 작은 케이크가 있어요. 비서가 같이 가서 만화도 보여 드릴 거예요. 어때요?”
그러면서 문밖을 향해 손짓했다.
“이 비서, 막내 아가씨 모시고 나가고 문 잘 닫아.”
나는 입에 박하사탕을 물고 있었다. 달면서도 씁쓸한 맛이 입속에 감돌았다.
고연준의 그 말은 대놓고 주제넘게 나서는 행동이었다.
손씨 집안에서 10년을 일했지만 고연준은 돈을 주고 고용한 개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은 그 개가 주인을 내쫓고 있었다.
그런데도 내 가족은 조금도 반응하지 않았다.
“가시죠, 막내 아가씨.”
이 비서가 들어와서 손을 뻗어 내 팔을 잡았다.
“고 변호사님, 굳이 서둘러 내보내실 것 있나요?”
유태오가 갑자기 웃더니, 손에 든 커피잔을 빙글빙글 돌리면서 흥미롭다는 눈길을 내게 보냈다.
“이분이 업계에 소문난 그 손씨 집안의 막내 아가씨죠?”
말투는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았다.
그런데 마치 따귀라도 갈겨서 손씨 집안 사람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정확하게 후려친 듯했다.
아빠의 안색이 순식간에 붉으락푸르락했다.
오빠는 홱 고개를 돌려서 날 선 눈으로 유태오를 노려보았다.
“유 대표님, 사업 이야기에 가족을 끌어들이지는 마시죠. 채윤이는 지능이 정상적이지 않아요. 그러니 예의를 지켜 주시죠.”
오빠의 목소리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평소 나를 바라보는 눈에는 실망이 가득했지만, 이 순간만큼은 본능적으로 나를 감쌌다.
유태오가 소리 없이 웃음을 흘렸다.
“사장님, 오해하셨어요. 제가 어떻게 존중하지 않겠어요?”
“저는 그저 손씨 집안의 생사가 갈리는 순간이니, 온 가족이 나란히 지켜보는 게 맞다고 생각했을 뿐이에요.”
“이 막내 아가씨에게도 보여 드려야죠. SS그룹이 본인들 손에서 어떻게 변하게 되는지요.”
심장을 후벼 파는 말에 화가 가득 난 언니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문밖을 가리켰다.
“유태오 대표님, 말씀이 너무 심한 거 아니에요?”
곧 고연준이 곧바로 일어서서 언니 앞을 막아서더니 허리를 살짝 숙였다.
그리고 말투는 역겨울 만큼 진지하고 공손했다.
“대표님, 아가씨도 순간 다급해서 그런 거니 너무 마음에 두지 마세요.”
“막내 아가씨가 여기 계시는 게 확실히 적절하지 않은 건 사실이에요. 만에 하나 놀라기라도 하면 회장님 마음도 편치 않으실 테고요.”
고연준은 고개를 돌려 아빠를 바라보았다.
“회장님, 그렇지 않나요?”
아빠가 나를 깊이 바라보았다.
피로가 가득한 그 눈길에는 어쩔 수 없다는 무력감과 완전히 체념한 사람의 공허함이 담겨 있었다.
내가 8살이던 해, 오빠는 나에게 글을 가르쳐 주겠다며 월가의 연봉 백만 달러짜리 자리를 마다하고 꼬박 1년을 집에서 나와 함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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