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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잃어버린 시간제2화

이 화는 약 1920자. 본 사이트에서는 제1~3화를 미리 읽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배남준은 모를 것이다.

내가 가장 힘든 때는 지금이 아니었다.

졸업이 가까워지던 그해, 나와 배남준은 같은 도시로 가서 취직하기로 약속했다. 떠나기 며칠 전, 나는 짐을 싼다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그런데 집 문을 떼고 들어서자마자 악몽 같은 장면이 펼쳐졌다.

의붓아버지가 엄마의 위에 올라타서 한손으로는 머리를 짓누르고 한쪽 손으로 주먹을 휘두르고 있었다.

돌아온 내 모습을 본 그는 동작을 멈추기는커녕, 더 심하게 폭행을 가했다.

“돈밖에 모르는 년! 너랑 네 딸 다 똑같아! 흡혈귀처럼 내가 벌어온 돈을 쪽쪽 빨아먹으면서도 내가 뭐 좀 하라면 그렇게 안 내키지. 오늘 너 죽고 나 죽자!”

순간 엄마의 애처로운 비명과 의붓아버지의 욕설이 한데 섞여 내 신경을 아프게 자극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진 나는 달려가서 그를 밀쳐 쓰러뜨렸다.

하지만 여자인 내가 건장한 그의 상대가 될 리 없었다. 바로 몸을 일으킨 그는 인정사정없이 내 귀뺨을 후려갈겼다.

엄마는 가까스로 몸을 일으키고는 그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애원했다.

“제발 애는 때리지 마세요. 윤주 앞으로 돈 벌어오면 되잖아요.”

돈 얘기가 나오자 그 짐승은 더욱 화를 냈다. 그는 엄마를 밀치고는 다가와서 내 목을 움켜잡았다.

그 순간 나는 곧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절망의 순간에 나는 책상 위에 놓여진 과일칼을 발견하고 한치 주저도 없이 그것을 집어 상대의 가슴에 찔러넣었다.

방금 스무 살을 넘긴 꽃다운 나이에 나는 그렇게 살인자가 되었다.

최종 심판이 있던 날, 나는 배남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전화에서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매정할 수 있냐고 따지고 들었다.

나는 흐르는 눈물을 소매로 닦고는 처음으로 비아냥거리는 말투로 그를 자극했다.

“배남준, 솔직히 말할게. 나 곧 출국하기로 했어.”

“누가 너 같은 거지랑 평생 같이 있어? 바보가 아닌 이상.”

내 마음과는 전혀 상반되는 그 말들은 그때 당시 괜찮은 월세방 하나 마련할 돈이 없었던 배남준에게 크나큰 타격이었을 것이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앞으로 후회하지 말란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그 뒤로 우린 더 이상 연락을 하지 않았다.

그날 최종 심판에서 나는 과실치사 혐의가 인정되어 유기징역 5년을 선고받았고 선고 후 닷새가 지나 엄마는 목을 매고 자살했다.

그날부터 나는 자유와 엄마를 동시에 잃었다.

너무 후회가 됐지만 이미 늦어버렸다.

배남준은 참 좋은 애인이었고 나에게는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존재였다.

하지만 살인죄가 인정되던 날, 이십 년간 쌓아온 나의 노력은 모두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나는 더 이상 그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출소하고 한동안은 어떤 회사도 받아주지 않아서 힘들게 배달직을 찾아서 일했다.

하지만 평소에 그렇게 나를 예뻐하던 사장님도 내가 범죄이력이 있다는 것을 알고는 태도가 갑자기 싸늘해지더니 욕설을 퍼부었다.

“야, 이거 본사에서 알면 우리 가게 문 닫아야 해! 이게 누구 인생 망치려고! 꺼져! 당장 안 꺼져?”

명문대 졸업생이 내가 배달일조차 거절당할 날이 올 줄 누가 알았을까?

결국 나는 교도소에서 배운 재봉기술로 노점을 차리고 장사를 시작했다. 매일 새벽에 나가서 밤중에 돌아오면서 힘겹게 일을 해야 겨우 끼니를 해결할 수 있는 정도였다.

배남준이 오늘 나한테 뿌려준 돈은 거의 내 한 달치 생활비였다.

하지만 이 돈은 받고 싶지 않았다.

돈에 맞은 볼이 얼얼하고 아팠지만 더 아픈 것은 상처입은 내 마음이었다.

잠들기 전, 나는 대학교 때 룸메이트였던 지은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녀는 내가 출소한 후에 유일하게 연락하고 지내는 친구였다.

“윤주야, 다음 달 내 결혼식에 배남준 초대했어. 우리 아빠가 걔랑 같이 사업하고 있어서 어쩔 수가 없었어.”

“그래도 꼭 와줄 거지? 이거 우리 대학교 때부터 약속한 거잖아.”

나는 아까 미처 돌려주지 못한 돈을 곱게 정리하고는 담담히 대답했다.

“괜찮아. 안 그래도 돌려줄 게 있었어.”

이 돈을 돌려주면 나도 그를 완전히 내려놓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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