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잃어버린 시간제1화
이 화는 약 2153자. 본 사이트에서는 제1~3화를 미리 읽을 수 있습니다.
배남준과 같은 도시로 떠나기로 한 날, 나는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그는 어쩌면 아마 평생 가도 고향에 간다고 짐을 싸고 내려간 내가 왜 갑자기 연락이 두절됐는지 이유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며칠 후, 나는 뻔뻔하게도 배남준에게 전화를 걸었고 전화를 받자마자 잔뜩 화가 난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임윤주, 나랑 헤어질 작정이야? 연락은 왜 안 받아?”
나는 주변에 둘러싸인 철창과 높은 담벽들을 바라보며 일부러 잔인한 말을 내뱉었다.
“그래. 나 곧 해외로 출국해.”
“그러니 다신 연락하지 말자.”
* * *
5년 후, 난 한 여행지의 야시장에 노점을 열어 생계를 유지했다.
한편으로는 여행객들에게 네일아트 서비스를 제공하면서 옆에는 수공예품을 쌓아 놓고 팔았다.
보슬비가 내리던 어느 날 저녁, 옆 가게 사장님이 들어갈 준비를 하며 나에게 소리쳤다.
“윤주 씨, 비도 오는데 안 들어가?”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하루종일 개장을 못해서 이대로 돌아가기 싫은 마음이 컸다.
인심 좋은 사장님은 안쓰러운 얼굴로 나에게 말했다.
“윤주 씨, 돈은 그렇게 버는 게 아니야. 하루종일 아무것도 안 먹은 것 같은데 그럼 안 돼. 건강부터 챙겨야지.”
그 말이 끝나기 바쁘게 점포 앞에 두 사람이 다가왔다. 선남선녀처럼 잘 어울리는 한쌍이었다.
“네일아트 한번 하는데 얼마예요?”
여자는 달콤한 목소리로 질문을 던지며 네일아트 샘플들을 만지작거렸다.
나는 습관적으로 고개를 숙이고 손님 의자를 깨끗이 닦은 뒤에 제품 소개를 했다.
“기본은 만 원, 복잡한 디자인은 2만 원 받아요. 손님이 마음에 든다면 여기 있는 인형 하나를 서비스로 드릴게요. 다 제가 직접 만든 거거든요.”
여자는 인형은 거들떠 보지도 않고 무심한듯 가장 유행하는 디자인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거로 할게요. 인형은 됐어요. 이런 듣보잡 제품은 거들떠도 안 보거든요.”
옆에 있던 남자는 우산을 그녀의 머리 위로 씌워주며 자상하게 말했다.
“비오는 날에 네일아트 한다고 나오는 여잔 너밖에 없을 거야.”
공구를 들고 있던 나는 저도 모르게 멈칫했다.
오래전에 질리도록 들었던 목소리였고 평생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소리였다.
그랬다. 배남준이 내 앞에 있었다.
나는 몰래 고개를 들고 그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는 예전보다 살이 좀 빠졌고 더 준수해졌다.
순간 폭풍우가 심장을 강타하는 것처럼 요동치고 진정이 되지 않았다.
나는 기계적으로 여자의 손을 잡고 고개를 숙인 채, 조금씩 그림을 그려나가기 시작했다.
배남준은 의자를 당겨다가 앉으면서도 우산을 잡은 손은 내려놓지 않았다.
나는 저도 모르게 대학교 때 매번 비 올 때면 기숙사 앞까지 찾아와서 날 기다려주고 나를 위해 우산을 씌워주던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런 그의 애정과 사랑은 이제 더 이상 내 소유가 아니었다.
이제 그는 내가 아닌 다른 여자의 옆에서 그 여자를 위해 비바람을 막아주고 그 여자만 바라보고 있었다.
“잠깐만요. 이거 다 지워주세요.”
여자가 갑자기 손을 빼가더니 손등을 호호 불며 말했다.
순간 나는 정신이 번쩍 들며 당황한 목소리로 그녀에게 물었다.
“손님, 혹시… 마음에 안 드시나요?”
그녀는 인상을 잔뜩 찡그린 채 고개를 저었다.
“손에 무슨 가시가 박힌 줄 알았어요. 어찌나 거칠던지 내 손이 다 아프잖아요.”
“손이 그래 가지고 어떻게 손님에게 네일아트를 해줘요? 사장님 장사할 줄 정말 모르네.”
나는 그제야 갈라터진 내 손을 내려다보았다.
오랜 기간 재봉일을 하다 보니 손가락 마디마디에 크고 작은 상처가 나 있었다.
순식간에 나는 얼굴이 화끈거리면서 가슴이 갑갑했다.
옆에 있던 배남준은 웃으며 그녀의 긴 머리를 쓰다듬더니 호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냈다.
“여기 돈 받으시고 네일아트는 지워주세요.”
말을 마친 그는 그제야 나를 쳐다보았다.
시선이 마주친 순간, 돈을 꺼내려던 그가 불현듯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의 표정이 서서히 굳어지더니 안면근육이 푸들거리기 시작했다.
한때는 너무 따뜻해서 나를 두근거리게 했던 예쁜 눈망울에 선명한 증오심이 서렸다.
여자는 핸드백에서 소독 티슈를 꺼내더니 손가락을 닦으며 그에게 물었다.
“뭐야? 남준 씨 아는 사람이야?”
그는 갑자기 피식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더니 지갑에서 현금 몇 장을 꺼내 내 머리에 던지며 싸늘히 말했다.
“몰라. 그냥 불쌍해 보이잖아.”
“거지한테 선심 쓴 셈 치고 이만 가자.”
그 말은 예리한 송곳이 되어 내 심장을 찔렀다.
우린 그렇게 몇 년 만에 재회했다.
하필이면 내가 가장 초라한 모습일 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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