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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집 평면도에서 지워진 내 이름제2화

이 화는 약 2556자. 본 사이트에서는 제1~3화를 미리 읽을 수 있습니다.

새 집으로 이사 온 지 나흘째 되던 날, 나는 창고조차 내 것이 될 수 없다는 걸 알게 됐다.

아침 식사를 하던 엄마가 아빠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예은이 나가면 창고 벽을 허물어서 서연이 옷방으로 넓혀줄까 해.”

“여자애들은 짐이 많잖아. 옷장 하나로는 부족하지.”

아빠는 빵을 한입 베어 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때 사람 불러서 치수부터 재보자.”

이서연은 젓가락을 입에 문 채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줌마, 진짜 괜찮아요. 옷이 그렇게 많지도 않은데...”

그러자 오빠가 웃으면서 이서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지금은 적어도 앞으로는 오빠가 사주면 되지.”

나는 맞은편에 앉아서 죽을 떠먹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누구도 내가 정말 대학원에 진학하고 싶은 건지, 이 집을 떠나고 싶은 건지 물어본 적이 없었다.

가족들이 원하는 건 그저 내가 떠나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내가 떠난 뒤에는 내가 머물렀던 흔적마저 지워버릴 생각이었다.

그날 오후, 배임호가 집에 왔다.

배임호의 손에는 크기가 다른 쇼핑백 두 개가 들려 있었다.

큰 쇼핑백 안에는 전문가용 마커 세트가 들어 있었다.

128색에 가죽 필통까지 들어 있는 제품이었다.

아직 떼지 못한 가격표에는 6만 원이 넘는 금액이 적혀 있었다.

배임호는 두 손으로 이서연에게 건넸다.

“현우 형한테 들었는데 그림 그리는 거 좋아한다며. 색깔도 많으니까 한번 써봐.”

이서연의 눈이 환하게 빛났다.

마커 케이스를 품에 안은 이서연은 마치 아이처럼 좋아했다.

그리고 배임호는 작은 쇼핑백을 내게 내밀었다.

열어보니 마트 할인 코너에서 파는 우유 사탕이었다.

노란 할인 스티커가 그대로 붙어 있었다.

1,200원이었다.

“가는 김에 네 것도 하나 샀어. 너 단 거 좋아하잖아.”

나는 단 걸 좋아하지 않았다.

그 얘기를 배임호에게 한두 번 한 게 아니었다.

나는 매운 걸 좋아했다.

겨울이면 뜨끈한 국수에 고춧가루를 잔뜩 넣어서 먹는 걸 가장 좋아했다.

코끝에 땀이 맺힐 정도로 매운 음식을 좋아했다.

하지만 배임호가 기억하는 취향은 언제나 이서연의 것뿐이었다.

“나 단 거 안 좋아해.”

배임호는 머리를 긁적이며 별일 아니라는 듯이 웃었다.

“그래? 그럼 서연이 줘. 버리긴 아깝잖아.”

나는 우유 사탕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창고로 돌아갔다.

문을 닫는 순간, 밖에서 이서연의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임호 오빠, 언니가 좀 기분 나빠 보이는데...”

배임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잠시 뒤 이서연이 마커 포장을 뜯는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배임호의 목소리도 들렸다.

“이 색 예쁘다.”

이제 배임호는 뒤에서 나를 평가하는 것조차 귀찮아하는 것 같았다.

그냥 처음부터 내가 존재하지 않는 사람인 것처럼 굴면서, 아무렇지 않게 이서연과 웃고 떠들었다.

차라리 몇 마디 욕을 듣는 게 덜 서러웠을 것이다.

해 질 무렵, 나는 물을 마시러 창고에서 나왔다.

그러다 부모님 방 앞을 지나는데 문이 살짝 열려 있었다.

아빠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안에서 들려왔다.

“여보, 예은이 요즘 좀 이상하지 않아? 이사 온 뒤로 말을 거의 안 하잖아.”

물을 든 내 손이 문 앞에서 멈췄다.

심장이 아주 잠깐, 빠르게 뛰었다.

하지만 엄마의 목소리가 곧바로 그 기대를 덮어버렸다.

너무도 가볍고 무심한 목소리였다.

“뭐가 이상해? 원래 어릴 때부터 저랬잖아. 말도 없고 답답하기만 하고. 괜히 봐주지 마. 버릇만 나빠져.”

아빠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더는 묻지 않았다.

나는 문밖에 서서 물컵을 들고 있었다.

손은 이상할 정도로 안정적이었다.

물 한 방울도 흘리지 않았다.

아무도 나를 알아차리지 못한 게 아니었다.

눈치채고도,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 거였다.

그날 밤 짐을 정리하다가, 거실에서 충전 중이던 이서연의 태블릿 화면에 쇼핑 알림 하나가 뜬 걸 봤다.

가구 브랜드 주문 내역이었는데, 결제 금액이 무려 360만 원이 넘었다.

배송지는 우리 집이었고, 결제한 사람은 바로 엄마였다.

그동안 새 침구며 커튼이며 침대 매트리스까지 하나씩 따져보니, 엄마가 이서연의 방을 꾸미는 데 쓴 돈은 이미 400만 원이 훌쩍 넘었다.

반면 내 창고에는 접이식 침대 하나 없었다.

이서연은 미안했는지 쇼핑백을 뒤적이다가 치마 한 벌을 꺼내 내게 건넸다.

“언니, 이거 언니가 입으면 진짜 예쁠 것 같아서 샀어. 내 돈으로 산 거야.”

분홍색 꽃무늬 치마, 이서연의 방에 달린 커튼과 같은 분위기였다.

이서연이 좋아하는 색과 무늬였지만, 나는 분홍색 옷을 입지 않았다.

내가 좋아하는 색은 파란색이었다.

그래도 나는 그 치마를 받아 들었다.

그리고 고맙다고 말했다.

이 집에서 적어도 이서연의 눈에는 내가 보였으니까.

비록 이서연이 보고 있는 게 진짜 ‘나’는 아니지만.

그날 밤, 요가 매트 위에 누워 있는데 휴대폰 화면이 켜졌다.

서북연구센터에서 온 최종 확인 메일이었다.

[강예은 연구원님, 입소 절차가 모두 승인되었습니다. 8월 15일까지 도착해 주십시오. 도착 후 통신 장비는 일괄 제출하게 됩니다.]

그리고 지도교수님의 메시지가 덧붙어 있었다.

[연구팀 모두가 널 기다리고 있어. 네 데이터 모델이 프로젝트의 핵심이야. 걱정하지 말고 와. 여기서 지낼 일은 전부 다 준비해 뒀으니까.]

나는 그 메시지를 몇 번이나 읽고 또 읽었다.

누군가는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누군가는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만 이 집에는 그런 사람들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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