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집 평면도에서 지워진 내 이름제1화
이 화는 약 3387자. 본 사이트에서는 제1~3화를 미리 읽을 수 있습니다.
새집으로 이사 가던 날, 엄마가 가족 단톡방에 평면도 한 장을 올렸다.
방 세 개에 거실 하나짜리 집이었다.
각 방 옆에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안방은 부모님, 작은 방은 오빠, 햇빛이 가장 잘 드는 남향 방에는 ‘서연의 방’이라고 되어 있었다.
이서연의 아버지는 예전에 물에 빠진 오빠를 구하려다 익사하셨다. 고아가 된 이서연은 우리 집에 와서 10년 동안 친딸처럼 자랐다.
사진을 확대했다가 다시 축소하며 몇 번이나 살펴봤지만, 내 이름은 어디에도 없었다.
엄마에게 묻자 잠시 멈칫하더니, 마치 그제야 그 사실을 떠올린 사람처럼 말했다.
[너 나중에 다른 지역으로 대학원 가고 싶다며? 합격하면 이사 갈 텐데, 그때 방을 비워두면 아깝잖아.]
[서연이는 다르지. 서연이 아빠는 우리 가족을 위해서 돌아가신 거잖아. 이 세상에 서연이에게 남은 가족은 우리밖에 없어. 이 큰 방은 꼭 서연이에게 남겨줘야 해.]
오빠는 이미 이서연과 함께 커튼을 고르고 있었다.
분홍색 꽃무늬, 이서연이 좋아하는 스타일이었다.
그리고 나와 3년째 사귀고 있는 남자친구 배임호는, 방금 조립한 책장을 이서연의 방으로 옮기고 있었다.
피규어를 놓을 칸을 하나 더 만들 건지 작은 목소리로 물어보면서.
나는 거실에 놓인 이삿짐 상자 위에 앉아서, 모두가 바쁘게 움직이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알고 보니 그 사람들은 나를 잊은 게 아니었다.
그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그 은혜를 갚기 위해서라면 내게 속한 모든 것을 내놓는 게 당연하다고 여기고 있었다.
심지어 내 남자친구마저 이서연에게 진 빚을 갚기 위한 부속품이 되어버렸다.
‘이 집에 내 자리가 없다면, 그럼 이 모든 걸 저 사람들에게 완전히 내주자.’
나는 고개를 숙인 채 휴대폰을 열고, 서북연구센터로 가서 5년 동안 집에 돌아올 수 없다는 내용의 비밀 유지 계약서에 서명했다.
이번에는 정말 떠난다.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 * *
계약서에 사인을 마친 순간에도 손끝이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거실의 그 누구도 나를 보지 않았다.
그때 배임호가 이서연의 방에서 나왔다.
이마에는 땀방울이 맺혀 있었고, 배임호는 자연스럽게 탁자 위의 생수병을 집어 들이켰다.
내가 배임호를 불러 세웠다.
“임호야, 오후 내내 바빴잖아. 좀 쉬어.”
배임호는 손등으로 입가를 닦으면서도, 시선은 이미 이서연의 방을 향하고 있었다.
“이따가 쉴게. 서연이 방의 커튼 봉이 좀 기울었더라. 다시 가서 맞춰야겠어.”
생수병을 아무렇게나 내려놓은 배임호는 다시 이서연의 방으로 들어갔다.
내 옆을 지나가면서도 나한테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3년 동안, 배임호는 나를 위해서 이렇게까지 신경을 써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대학 기숙사로 이사하던 날, 박스 5개를 나 혼자 하나씩 6층까지 날랐다.
배임호는 갑자기 일이 생겨서 못 온다고 했다.
그런데 나중에 이서연의 SNS를 보니, 그날 배임호는 이서연과 놀이공원에 가 있었다.
엄마가 부엌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앞치마도 미처 두르지 않은 상태였다.
“예은아, 거기 앉아서 뭐 해? 가서 서연이 침대 시트 좀 갈아줘. 새 침구 세트는 현관 앞 봉지에 있어.”
나는 복도 모퉁이에 쌓여 있는 내 짐 상자들을 바라봤다.
비스듬히 기울어진 채 복도를 절반이나 막고 있었다.
아무도 옮겨주지 않았고, 어디에 둘 건지 물어보는 사람도 없었다.
“엄마, 내 짐은 어느 방에 둬요?”
엄마는 턱짓으로 베란다 옆의 작은 문을 가리켰다.
“창고 방부터 정리하고 그냥 지내. 어차피 처음도 아니잖아. 어릴 때도 한동안 거기서 잤었잖아.”
어릴 때 그랬던 건 이서연이 막 우리 집에 왔을 때였다.
그해 오빠가 강가에서 물놀이를 하던 오빠가 발을 헛디디며 물에 빠지고 말았다.
마침 지나가던 이서연의 아버지가 오빠를 물 밖으로 밀어 올렸지만, 자신은 그대로 급류에 휩쓸려 돌아가셨다.
아저씨를 강가로 불러서 아이를 좀 구해달라고 한 사람이 바로 엄마였다.
엄마는 평생 그 빚을 마음에 품고 살아왔다.
그래서 이서연이 우리 집에 들어오던 날, 엄마는 그녀를 끌어안고 오후 내내 울었다.
“이제부터 여기가 네 집이야. 누구도 네가 서럽게 지내게 내버려두지 않을 거야.”
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나에게 말했다.
“서연이가 막 아버지를 잃었으니, 네 방을 좀 비워줘. 며칠만 버티면 돼.”
그 며칠이 꼬박 일 년이 되었다.
그리고 지금, 또다시 나는 베개와 얇은 이불을 안고 창고 방으로 들어갔다.
4제곱미터도 안 되는 좁은 공간에는 걸레통과 잡동사니가 가득 쌓여 있었고, 눅눅한 곰팡내가 코를 찔렀다.
창문도 없고, 필라멘트가 그대로 드러난 백열전구 하나가 겨우 어두운 방 안을 밝히고 있었다.
시멘트 바닥에다 요가 매트를 깔았다.
그게 침대였다.
저녁이 되자, 엄마는 이사 축하라며 배달 음식을 한 상 가득 시켰다.
생선구이, 치킨, 망고 크레이프...
거실 탁자에 가득 차려진 음식들은 전부 다 이서연이 좋아하는 것들이었다.
오빠는 이서연의 그릇에 닭 날개를 집어주고, 배임호는 생선 가시를 발라서 그녀에게 건넸다.
나는 그저 흰밥만 조용히 먹었다.
아무도 내가 반찬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
식사가 끝난 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부엌으로 들어갔다.
찬장을 뒤져서 남아 있던 라면 한 봉지를 꺼내고 작은 냄비에 물을 올렸다.
그때 엄마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뭐 하는 거야? 다들 밥 먹고 있는데 너 혼자 부엌엔 왜 갔어?”
“라면 좀 끓이려고요.”
“밥상에 먹을 게 이렇게 많은데 굳이 혼자 따로 해 먹겠다고? 서연이가 어떻게 생각하겠어? 자기가 잘못한 줄 알잖아.”
나는 불을 끄고, 라면을 쓰레기통에 버렸다.
거실에서 이서연이 불안한 표정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언니, 혹시 이런 음식 안 좋아해? 다음에는 내가 아줌마한테 언니 좋아하는 걸로 해달라고 말해볼게...”
오빠가 짜증스럽게 손을 저었다.
“밥 한 끼 먹는 것까지 꼭 일을 만들어. 그냥 내버려둬.”
배임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웃으면서 고개를 숙인 채 이서연의 새우 껍질을 계속 까주고 있었다.
그 미소에는 어떤 악의도 없었다.
그런데도 그게 어떤 비난보다도 더 견디기 힘들었다.
배임호는 일부러 나를 무시하는 게 아니었다.
정말로 이 일은 자신과 아무 상관도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창고 방으로 돌아와 문을 닫았다.
배가 고팠다.
하지만 먹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요가 매트에 누워 있자니, 휴대폰 화면에는 아까 사인한 비밀 유지 계약서가 그대로 떠 있었다.
하얀 백지에 검은 글씨로 또렷하게 적혀 있었다.
[5년간 근무, 무단이탈 금지.]
이 계약서는 지도교수가 직접 추천해 준 것이었다.
내 논문과 데이터 분석 능력이라면, 연구팀 전체에서 나만 한 사람이 없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말해봤자 아무 소용도 없을 테니까.
이 집에서는 내 전공도, 내 성적도, 내가 기울인 어떤 노력도 이야기할 가치가 있는 것으로 여겨진 적이 없었다.
근무 시작일은 8월 15일이었다.
앞으로 23일이 남았다.
23일 후면 나는 이 집에서 완전히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가족들은 한참이 지나서야, 비로소 이 창고 방이 비었다는 걸 알아차리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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