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집 평면도에서 지워진 내 이름제3화
이 화는 약 2445자. 본 사이트에서 읽을 수 있는 3화 미리 읽기 중 마지막 화입니다. 이어지는 제4화부터는 공식 앱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새 집으로 이사 온 지 열흘째 되는 날은 배임호와 내가 사귄 지 3년이 되는 날이었다.
나는 이틀 전부터 배임호에게 약속 시간을 확인했다.
배임호는 곧바로 대답했다.
[토요일 오후지? 기억하고 있어.]
토요일 아침, 나는 종이 상자를 모조리 뒤져서 유일하게 보풀이 일지 않은 가디건 하나를 찾아냈다.
물티슈로 흰 운동화에 묻은 얼룩을 몇 번이고 닦았다.
창고에 있는 손바닥만 한 둥근 거울 앞에서 30분 동안 옅은 화장을 했다.
약속한 레스토랑에 도착해서 창가 자리를 골랐다.
그리고 음료 두 잔을 주문했다.
한 잔은 아메리카노, 한 잔은 배임호가 좋아하는 아이스 라떼였다.
얼음이 녹으면 다시 얼음을 채우고, 또 녹으면 다시 채웠다.
두 시간 반 동안 전화는 연결되지 않았고, 메시지에도 전혀 응답이 없었다.
저녁 6시가 되어서야 배임호에게 메시지가 왔다.
[정말 미안해. 오늘 서연이 걔가 갑자기 자기 아빠가 예전에 자주 가던 강가에 가고 싶다고 했어.]
[상태가 너무 안 좋아 보여서 혼자 뒀다가 무슨 일 생길까 봐 같이 있었어. 다음에 내가 제대로 챙겨줄게.]
그리고 사진 한 장이 함께 도착했다.
강가 난간 옆에 고개를 숙이고 있는 이서연, 그 뒤에 서서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있는 배임호였다.
저물어 가는 석양 아래, 두 사람의 그림자는 길게 늘어져서 하나로 겹쳐 있었다.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이 사진만 봤다면, 누구라도 두 사람이 연인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나는 그 사진을 한참 동안 바라봤다.
그러고는 차갑게 식어버린 아메리카노를 단숨에 들이켰다.
너무 써서 혓바닥 전체가 텁텁하고 떫었다.
나는 두 사람 몫의 식사비를 혼자 계산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음 날 아침, 배임호가 우리 집으로 찾아왔다.
손에는 빨간 장미 한 다발이 들려 있었다.
포장지는 꽃집에서 나는 향초 향이 느껴질 만큼 고급스러웠다.
순간, 내 심장이 쿵쿵거리면서 거세게 뛰었다.
하지만 배임호는 현관에서 곧장 복도로 방향을 틀었다.
그리고 이서연의 방문을 열었다.
“어제 많이 힘들었지? 이거 줄게. 앞으로는 매일매일 행복하게 지내.”
방 안에서 이서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울어서 잠긴 목소리였다.
“임호 오빠, 고마워...”
벽을 짚은 내 손에 힘이 들어가면서, 손톱이 천천히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임호야.”
몸을 돌려 내가 복도에 서 있는 걸 본 배임호는 잠시 당황하더니, 이내 뭔가 들킨 사람처럼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어제가 우리 3주년이었어.”
배임호는 자기 이마를 치면서 과장되게 후회하는 표정을 지었다.
“아, 맞다. 내가 뭘 잊었나 했어! 다음에, 다음에는 꼭 챙길게.”
“그런데 서연이한테 줄 꽃은 기억했네.”
“꽃집 지나가다가 그냥 산 거야. 얼마 하지도 않아...”
“임호야.”
나는 배임호를 바라봤다.
“우리 3년 만나는 동안, 넌 나한테 꽃을 한 번도 사준 적이 없잖아.”
순간 공기가 얼어붙었다.
배임호의 얼굴에서 미안함이 조금씩 사라지더니, 내게 너무도 익숙한 짜증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너 좀 그렇게 속 좁게 굴지 마. 서연이가 어제 아버지 생각나서 강가에 갔다가 오후 내내 울었다고.”
“그래서 위로하려고 꽃 한 다발 사준 게 뭐가 문제야? 네가 언니인데 좀 이해해 주면 안 돼?”
소리를 듣고 나온 오빠는 반사적으로 배임호의 편에 섰다.
“그만 좀 해. 서연이 아버지가 나를 구하다가 돌아가신 거잖아. 우리 가족들이 서연이를 좀 더 아껴주는 게 당연한 거 아니야?”
나는 이서연과 비교하려던 게 아니었다.
그저 내 남자친구에게 묻고 싶었을 뿐이었다.
배임호의 마음속에서 나는 대체 어떤 존재인지.
하지만 아무도 그 질문에 답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창고방으로 들어가서 문을 잠갔다.
바닥에 앉아서 휴대폰 연락처에 저장된 지 3년 된 그 이름을 꺼냈다.
[배임호.]
저장된 이름 뒤에는 작은 태양 이모티콘이 붙어 있었다.
잠시 고민하다가, 저장된 이름도 지웠다.
배임호는 이미 내 태양이 아니었다.
나를 향해 한 번 눈길을 주는 것조차 아까워하는 사람이었으니까.
저녁 식사 시간, 이서연은 몰래 내 그릇에 갈비 한 조각을 올려주었다.
“언니, 이제 그만 화 풀어. 임호 오빠도 일부러 그런 건 아니잖아.”
나는 진심으로 나를 바라보는 이서연의 눈을 보다가, 갑자기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이서연은 아무런 악의도 없이 내게 있어야 할 모든 것을 가져갔다.
그러고는 그중 부스러기만 조금 내게 내밀었다.
그러면 모두가 이서연은 할 만큼 다 했다고 생각했다.
가장 무서운 건 정작 이서연 자신은 자기가 뭘 하고 있는지조차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그날 밤, 나는 요가 매트 위에서 몸을 일으켜서 휴대폰 뱅킹 앱을 열었다.
통장에는 192만 원이 있었다.
대학교 1학년 때부터 과외를 하고, 전단지를 돌리고, 카페에서 야간 아르바이트까지 하면서 3년 넘게 한 푼 두 푼 아껴 모은 돈이었다.
서북으로 가는 기차표를 사기에는 충분했다.
돈은 기지에 도착한 뒤에 다시 천천히 모으면 된다.
나는 은행 카드를 몸에 가까이 챙겨 넣고 다시 누웠다.
백열전구가 나지막하게 웅웅거리는 소리를 냈다.
이 창고에는 아무것도 없었지만, 적어도 조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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