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우스도 못 쥐는 내가 널 쓰러뜨렸어제2화
이 화는 약 2334자. 본 사이트에서는 제1~3화를 미리 읽을 수 있습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고한결에게 전화를 걸었다.
귀가 먹먹할 정도로 요란한 환호성 속에서 왜 나를 배신하고 다른 여자에게 청혼했느냐고 물었다.
웃음기가 조금 섞여 있는 고한결의 목소리가 나른하게 들렸다.
[팀에 화제성이 필요해. 팬들은 내가 어린 여자랑 함께 있는 걸 좋아하거든.]
[다연아, 대표 사모님이 되고 싶으면 그릇을 좀 키워.]
‘그릇을 좀 키우라고?’
그 말을 듣는 순간 내 손끝이 차갑게 식었다.
3년 전, 팀이 가장 가난했던 시절, 어느 사업가가 20억을 투자해 고한결을 e스포츠계의 슈퍼스타로 띄워 주겠다고 했다.
물론 조건이 없을 리는 없었고, 그 조건은 나를 버리는 것이었다.
고한결은 그 자리에서 수표를 찢어 버렸다.
밖에 폭우가 쏟아지던 그날, 고한결은 고열에 시달리는 나를 업고 흙탕물 속을 비틀거리며 이를 악물고 걸었다.
“내 여자 하나 못 지키면서 이딴 돈 벌어서 뭐 해?”
지난 일들이 눈앞에 선하게 떠올랐다.
나는 도무지 믿을 수 없었지만 그래도 고한결의 설명만큼은 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튿날 아침, 휴게실 문을 밀고 들어서자 보이는 눈앞의 광경에 난 숨이 턱하고 막혔다.
벌거벗은 두 몸이 뒤엉켜 있었고 바닥에는 피임 도구가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이윽고 손유진이 비명을 지르며 고한결의 품으로 파고들었고, 남자는 눈을 가늘게 뜨고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정신을 차린 뒤에야 손유진의 어깨를 두드리며 먼저 나가 있으라는 신호를 보내고는 자연스럽게 몸을 돌려 내게 지시했다.
“물 한 잔 떠 와.”
“가는 길에 바닥에 있는 것도 좀 치워. 도우미 아주머니가 보면 곤란하잖아.”
내가 움직이지 않자 고한결은 그제야 뭔가 떠오른 듯 담담하게 한마디를 던졌다.
“어제 취해서 그런 거야. 쩨쩨하게 굴지 마.”
나는 눈시울이 벌게진 채 물잔을 들어 고한결의 얼굴에 그대로 끼얹었다.
그리고 손유진을 캠프에서 내보내라고 몰아붙였다.
고한결은 몹시 충격을 받고 분노하는 나를 보며 애완동물을 달래듯 한숨을 쉬었다.
“알았어. 내일 다른 데로 보낼게. 그만해, 보기 흉해.”
억울해서였을지도 몰랐다.
아니면 목숨을 걸고 함께 버텨 온 7년이 아까워서였을지도 몰랐다.
나는 적어도 마지막 선만큼은 지켰다고 자신을 속였다.
내 생일날 창밖에는 폭우가 쏟아졌고, 나는 고한결이 가장 좋아하는 국을 끓여 캠프 건물 아래에서 그를 기다리며 꼬박 두 시간을 서 있었다.
고한결에게 핑계를 만들어 주고 싶었고, 나 자신에게도 물러설 곳 하나를 만들어 주고 싶었다.
그런데 돌아온 것은 광장 대형 전광판을 뒤덮은 생중계였다.
고한결은 거대한 놀이공원 하나를 통째로 빌렸고, 눈부신 불꽃놀이 아래에서 진즉 내보내야 했을 손유진의 생일을 축하해 주고 있었다.
이윽고 국물이 빗물과 섞여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내가 이를 악물고 참고 비위를 맞춰 온 모든 것들이 웃음거리가 된 것이었다.
머리끝까지 화가 난 나는 고한결과 손유진의 사진과 폭로 자료를 연예 매체에 넘겼다.
고한결에게 따끔하게 한 번 가르쳐 줄 생각이었다.
그런데 고한결은 내가 낸 기사를 덮어 버리고, 되레 나를 끈질기게 매달리는 미친 여자로 만들어 버렸다.
나는 온 인터넷에서 네티즌들에게 욕을 먹었다.
광기에 사로잡힌 팬들은 내 집 주소까지 알아내 오물을 뿌리고 썩은 달걀을 던졌다.
그러던 어느날 고한결이 나를 꼭대기 층 사무실로 부르더니 내 눈앞에서 7년 전 무허가 PC방에서 함께 따낸 첫 메달을 꺼내게 했다.
싸구려라 칠이 벗겨져 있었지만, 한때 우리에게는 보물과도 같았던 물건이었다.
고한결은 그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던져 소파에 앉은 손유진에게 넘겼다.
“유진이네 집 개가 마침 목줄에 달 펜던트가 없대. 크기 보니까 이 메달에 딱 맞겠더라.”
고한결은 조금의 동요도 없이 평온하게 말했다.
“말을 안 들으면서 남겠다고 했잖아. 그럼 이런 옛날 물건은 갖고 있어 봐야 소용없는 거 아니겠어?”
그 순간, 내 머릿속에 남아있던 이성의 끈이 뚝 하고 끊겼다.
나는 미친 듯이 달려들어 두 사람의 차 문을 붙잡고 메달을 되찾으려 했다.
그러나 경호원들이 달려와 나를 바닥에 꽉 짓눌러 일어나지 못하게 막았다.
고한결은 그 자리에서 경찰을 부르고는 세상에 내가 정신이 이상해졌다고 발표한 뒤, 나를 유치장에 하룻밤 가둬 두었다.
다음 날 아침 풀려난 나는 미친 사람처럼 고한결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53통을 걸어서야 마침내 전화가 연결됐고 들려온 것은 다름 아닌 손유진의 간드러진 웃음소리였다.
[선배님, 오빠 지금 내 머리 말려 주고 있어요. 그 낡은 메달은 우리 집 강아지도 싫어하길래 그냥 쓰레기통에 버렸어요.]
그 말을 남기고는 손유진은 전화를 끊었다.
이윽고 나는 위가 뒤틀리며 아프기 시작했고 너무 아파서 서 있을 수도 없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손가락질하는 가운데, 나는 망가진 오른손을 뻣뻣하게 뻗었다.
그리고 절망에 빠진 채 바닥에 떨어진 유리 조각 하나를 주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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