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우스도 못 쥐는 내가 널 쓰러뜨렸어제1화
이 화는 약 2869자. 본 사이트에서는 제1~3화를 미리 읽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만난 지 7년째 되던 해, 고한결은 마침내 팀을 이끌고 월드 챔피언십에서 우승했다.
그런데 아무런 예고도 없이 원래 내 것이었던 프러포즈 반지를 다른 여자의 손가락에 끼웠다.
“손이 차다길래 그냥 끼워 준 거야. 괜찮지?”
고한결은 하늘을 향해 맹세했다.
최고의 영광을 상징하는 반지를 프러포즈 반지로 삼아 직접 내 손가락에 끼워 주겠다고.
그런데 지금은 새파랗게 어린 여자가 고한결의 뒤에 쭈뼛거리며 숨어서 자기 약지에 끼인 헐렁해서 볼품없는 반지를 빙글빙글 돌리고 있었다.
나는 이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에 넋을 잃고 고한결을 바라보았다.
* * *
“7년 전에 나한테 약속했던 거잖아. 그걸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저 사람한테 줘버린다고?”
고한결이 나를 무심하게 한 번 바라보더니 미간을 살짝 찌푸리면서 말했다.
“그깟 반지 하나 가지고 뭘 그래?”
“너 이제 마우스도 못 쥐잖아. 그 반지 네가 끼고 있어 봐야 무슨 의미가 있어?”
가볍게 한마디를 내뱉은 고한결은 시선 끝으로 거의 망가져 버린 내 오른손을 정확히 찔렀다.
나는 그 자리에 멍하니 굳어 버렸다.
문밖에서 들려오던 환호성은 갑자기 날카롭게 나의 귀를 찔렀다.
고한결은 태연하게 샴페인 한 병을 따서 손유진이 손에 든 잔에 따라 주었다.
“지난달에 너 손 다쳤던 거 결국 재발해서 은퇴를 발표했던 날 밤...”
두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은 고한결은 오늘 날씨를 이야기하듯 담담하게 말했다.
“나 PC방에서 유진이랑 밤새 듀오 돌렸어.”
머릿속에서 웅웅 하는 소리가 울렸고 나는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고한결을 바라보았다.
그날 나는 혼자 병원에서 주사를 맞았다.
굵고 긴 바늘이 뼈 사이로 파고드는 통증에 식은땀이 비 오듯 흘렀다.
너무 아파 몸을 부들부들 떠는 와중에도 나는 밤새 고한결에게 수없이 많은 메시지를 보냈다.
그러나 고한결이 보낸 답장은 고작 한 줄이었다.
[지난 경기 복기 중이라 바빠.]
“어쩔 수 없잖아. 너는 이제 게임을 못 하고 랭킹은 올려야 하니까 같이할 사람이 필요했어.”
고한결은 대수롭지 않게 나를 바라보았다.
“그래도 우리 사이가 사이인 만큼, 너에게 섭섭하게 하지는 않을게.”
“은퇴는 했어도 팀에 남아서 다른 일 하면 돼. 월급은 두 배로 올려 줄 거고, 연말 보너스도 빠짐없이 챙겨 줄게.”
불과 30분 전만 해도 고한결은 내 손을 잡고 수많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우승 트로피를 함께 들어 올리고 있었다.
나는 그것이 우리 청춘의 7년을 장식할 가장 완벽한 마침표로 생각했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전개에 눈물이 바닥으로 툭 떨어지며 나는 멍하니 고한결을 바라보았다.
“이거 바람이잖아!”
고한결은 한숨을 내쉬더니 내 앞으로 다가오더니 더없이 다정한 손길로 내 눈물을 닦아주었다.
“우리가 결혼한 사이도 아닌데 어떻게 바람이라고 할 수 있어?”
고한결은 마치 철없는 아이를 달래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
“원래는 계속 숨기려고 했는데 쟤가 삐쳤잖아. 그러니까 좀 달래 줘야지.”
“넌 마음도 넓고 어린애도 아니잖아. 그냥 계속 내 곁에 있어. 예전처럼 똑같이 대해 줄게.”
“그래도 정 네가 떠나야겠다면 나도 붙잡지 않을게. 네 마음대로 해.”
말도 안 되는 고한결의 말에 나는 속이 뒤집혔다. 그리고 반사적으로 구역질이 나기 시작했다.
나는 고한결의 손을 거칠게 뿌리치고는 곁에 있던 진열장에서 방금 딴 우승 트로피를 집어 들어 바닥에 힘껏 내리쳤다.
“꺼져!”
유리 파편과 금속 받침대가 산산조각 났고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곧 손유진이 비명을 지르며 화들짝 놀라 고한결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고한결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더니 눈에는 조금도 숨기지 않은 혐오감이 스쳤다.
“너는 생떼 쓰는 것 말고 할 줄 아는 게 뭐야?”
“상대하기도 귀찮으니까 알아서 해.”
고한결은 겁에 질린 손유진을 감싸안은 채 몸을 돌려 문을 쾅 닫고 나갔다.
“오늘 우승 파티는 우리끼리 갈 테니까, 너는 여기서 머리 좀 식혀.”
문을 다시 열고 고함지르듯 이야기하다가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을 닫아버렸다.
방 안은 텅 비었고 밖에서는 모두가 그들만의 축제를 즐기고 있었다.
나만 바닥에 주저앉아 공허한 눈빛으로 굳게 닫힌 문을 바라봤다.
그리고 참 야속하게도 오른쪽 손목의 오래된 부상이 욱신거려 더 서럽기만 했다.
7년 전, 나는 고한결과 비좁은 무허가 PC방에 웅크리고 있었다.
둘이서 컵라면 하나를 나눠 먹었고, 삶은 달걀 하나를 추가하는 것조차 남은 통장 잔액을 헤아리며 한참을 망설였다.
고한결은 내 옷을 사 줄 돈을 모으기 위해 혼자 불법적인 대회에 나간 적도 있었다.
그때 시비가 붙어 머리가 깨져 피가 흐를 정도로 얻어맞기도 했다.
그날 고한결은 피범벅이 된 얼굴로, 따낸 십몇만 원을 현금으로 품에 꼭 끌어안고 지켰다가 내 손에 통째로 쥐여 주었다.
어두운 골목에서 고한결의 눈은 다이아몬드처럼 빛났다.
“내가 세계 대회에 나가서 우승하잖아? 그렇게 되면 그 우승은 내 것이 아니라 온전히 네 거야.”
그때의 맹세가 아직도 귓가를 울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의 캠프는 이글루가 된 것처럼 추웠고, 나는 웅크린 채 두 팔로 내 몸을 꼭 끌어안았다.
지난날의 아름다운 기억을 떠올리며 오늘 벌어진 모든 일을 애써 지워 보려고 했다.
그러던 순간, 휴대폰 화면이 밝아지더니 고한결이 좀처럼 하지 않던 라이브 방송을 켰다.
화면에는 다른 사람 없이 손유진 혼자 있었다.
마이크를 통해 화면 밖에서 손유진을 달래는 고한결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려왔다.
[내가 걔한테 묶여 있었던 거야. 속상해하지 마. 반지는 처음부터 너한테 주려고 했던 거니까.]
부러움 가득한 댓글이 화면을 가득 메우며 빠르게 올라갔다.
내 심장은 칼로 갈기갈기 찢기듯 더더욱 아팠고 피가 뚝뚝 떨어질 것만 같았다.
더는 그 꼴을 못 볼 것 같아 손목을 부들부들 떨며 방송에서 나가려고 했다.
종료 버튼을 누르려던 바로 그 순간, 화면에서 거센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고한결이 원래 내 것이었던 프러포즈 반지를 들고 한쪽 무릎을 꿇더니 다른 여자에게 청혼하는 장면이 송출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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