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돌아온 그날 밤의 다른 선택제2화
이 화는 약 2652자. 본 사이트에서는 제1~3화를 미리 읽을 수 있습니다.
[아마 어린 남동생이 걱정돼서 그러시는 거겠죠. 밖의 날씨가 워낙 심각하니까요. 조금만 더 기다려볼게요. 어쩌면 비가 잦아들지도 모르니까요.]
한유진의 동정심을 유발하는 멘트에 부서 단톡방이 순식간에 폭발했다.
[오늘 밤 태풍이 좋아질 기미는 전혀 없잖아.]
[서은영 씨는 집이 고지대에 있으니까 괜찮겠지만, 모두가 그런 혜택을 누릴 수 있는 건 아니라고요.]
[서은혁 씨가 누구를 구조하러 가는 것도 아니잖아요. 그냥 가장 가까운 호텔까지 태워다 주는 것뿐인데 너무한 거 아닌가요?]
끊임없이 울리는 알림 소리를 듣던 아버지가 서재에서 나왔다.
아버지가 창밖을 향해 시선을 돌리자, 거센 빗줄기가 유리창을 세차게 두드리고 있었다.
“오늘 밤 은혁이는 절대 밖에 내보내지 마라.”
그 말은 전생에서 아버지가 했던 말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전생의 나는 아버지의 말을 듣지 않았다.
한유진은 대학을 갓 졸업하고, 이 도시로 이사 온 지도 얼마 되지 않았다.
혼자 살고 있으며, 이제 막 자신의 커리어를 만들어가려던 참이었다.
나는 그저 한유진을 도와주는 것이 사람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몇 주 뒤, 시위대가 우리 집 앞에 몰려들었다. 그들은 내 남동생을 강간범이라고 적은 피켓을 들고 있었다.
누군가는 우리 집 현관문에 붉은 페인트를 뿌렸고, 기자들은 며칠 동안이나 우리 집 앞을 지키며 진을 쳤다.
거래처들이 하루아침에 우리 가족 사업과의 거래를 끊어버리자, 아버지는 뇌졸중으로 쓰러지셨다.
어머니는 소리를 지르며 몰려든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채 계란과 쓰레기까지 맞은 뒤 결국 심장마비를 일으키고 쓰러지셨다.
나는 아직도 두 분이 길바닥에 쓰러진 채 나를 향해 손을 뻗는 모습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날이었다.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무작정 베푸는 동정심은,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을 파멸시킬 수도 있다는 것을 말이다.
그때 휴대폰이 다시 진동했다. 새로운 알림이었다.
강도윤이 나를 태그했다.
[서은영 씨, 지역 부사장 인사 결정은 다음 주에 최종 확정됩니다.
리더십은 분기별 실적만으로 평가되는 게 아닙니다. 팀원이 도움이 필요한 순간, 어떻게 행동했는지를 사람들은 기억합니다.]
그 말은 직접적인 명령은 아니었다. 은혁의 이름을 언급하지도 않았다.
그저 내가 얼마나 동정심 많고 배려심 있는 사람처럼 보이느냐에 따라 내 승진이 결정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아주 교묘하게 상기시키는 말이었다.
나는 답장을 보내기 전 잠시 키보드 위에 손가락을 올려놓았다.
[제 대응은 회사의 긴급 상황 대응 절차에 완전히 부합합니다. 한유진 씨, 정확한 주소와 아파트 호수를 보내주세요.]
[침수 때문에 밖으로 나가는 것조차 위험한 상황이라면, 시 재난 대응팀에 연락하고 필요할 경우 긴급구조대와 협조하겠습니다.]
한유진의 답장이 거의 바로 돌아왔다.
[제발 그러지 말아 주세요. 지금 제가 사는 곳이 불법 재임대를 받은 집이라서요. 구조대가 오면 집주인이 저를 당장 내쫓을 거예요. 저는 이제 막 졸업해서 가진 것도 없는데 제가 가진 유일한 집까지 잃을 수는 없어요.]
부서 단톡방의 동정 여론은 완전히 한유진 쪽으로 기울었다.
[이미 저렇게 힘든 상황에 처해 있는데, 회사 규정 뒤에 숨지 마세요.]
‘내가 한유진을 곤란하게 만들고 있다고? 그들 중 단 한 명이라도 생각해 본 사람이 있을까?’
‘나를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는 곤란한 상황에 몰아넣는 건 한유진이라는 사실을.’
[난 서은영 씨가 진심으로 자기 팀원들을 아끼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요. 제가 잘못 봤나 보네요.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도와줄 수도 있으면서, 그냥 지켜보기만 하고 말이죠.]
[불쌍한 한유진 씨. 저런 팀장을 만났으니 얼마나 힘들겠어요.]
나는 작게 코웃음 쳤다.
[한유진 씨에게 차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분이 있다면, 직접 자원해서 데려다주세요. 제 남동생은 오늘 밤 이 집을 떠나지 않을 겁니다.]
나는 메시지를 전송하고, 부서 단톡방의 알림을 껐다. 그리고는 휴대폰 화면을 잠가버렸다.
내 뜻을 굽히지 않은 대가로 승진을 놓치게 되든, 심지어 회사를 그만두게 되든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그로부터 1초도 지나지 않아 은혁의 휴대폰 화면이 켜졌다. 은혁은 미간을 찌푸리며 휴대폰 화면을 내게 보여줬다.
한유진 님이 회원님과 연결하고 싶어 합니다. 한유진은 어떻게 알아냈는지 은혁의 비공개 계정까지 찾아낸 모양이었다.
한유진이 보낸 연결 요청에는 단 한 문장만 적혀 있었다.
[괜히 불편을 끼쳐서 죄송해요. 저는 처음부터 당신을 이 일에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어요.]
나는 은혁의 손에서 휴대폰을 가져왔다.
[거절, 그리고 차단.]
은혁은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래도 괜찮은 사람처럼 보이는데. 일부러 누군가를 조종하려는 것 같지는 않아.”
나는 은혁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은혁아, 이건 꼭 기억해.”
“정말 위험한 상황이라면 긴급구조대에 연락하고, 건물 관리사무소에도 연락해. 그리고 제대로 된 해결 방법을 찾는 게 정상이야.”
“그런데 누군가가 그런 정상적인 방법은 싹 무시한 채 굳이 너한테만 도움을 요청한다면, 그건 구조받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이유로 네게서 원하는 게 있기 때문이야.”
은혁은 눈을 한 번 깜빡였다. 내 말이 은혁의 머릿속에 깊이 남은 듯했다.
나는 은혁의 등을 살짝 밀어 방으로 향하게 했다.
“지금부터는 계속 집 안에 있어. 밖에는 절대 나가면 안 돼.”
은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할게.”
잠시 후, 은혁의 방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철컥-
그제야 나는 비로소 안심하며 숨을 내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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