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의 끝, 재가 된 혼약제2화
이 화는 약 1721자. 본 사이트에서는 제1~3화를 미리 읽을 수 있습니다.
"우리 어마마마가 정실이니 네가 시집와도 첩일 뿐이야!"
천진한 아이의 말은 거침이 없다. 그래서 더 아프게 파고들 때가 있다.
시선을 돌려 서겸을 보았다.
"최서겸, 저 말이 사실이야?"
그가 내 손을 꽉 쥐며 조심스레 눈치를 살폈다.
"연서야, 나도 어쩔 수 없었어. 은류강 물살이 워낙 거세서 내가 구하지 않았으면 난영이는 죽었을 거야."
속으로 헛웃음을 삼켰다. 말에도 비웃음이 배어 나왔다.
"물살이 어찌나 거셌으면 두 사람 옷을 죄다 찢어 놓았을까."
그 손을 뿌리쳤다. 그를 바라보는 눈길에 혐오가 묻어났다.
"혼인 서약서를 쓸 때 분명히 말했을 텐데. 우리 집안 여자는 죽어도 첩이 되지 않는다고."
서겸이 눈살을 좁히며 나를 응시했다.
그러고는 내 뒤에서 분주히 움직이는 시녀와 하인들을 보았다.
사흘 뒤로 정해진 혼례를 준비하는 중이었다.
"연서야, 너는 열여섯 꽃다운 나이부터 스물이 넘도록 나를 꼬박 칠 년이나 기다렸어. 나 때문에 부모님 뜻까지 거스르고 혼인도 하지 않았다는 건 도성 사람이라면 다 알아."
"네 이름은 이미 나와 떼어 놓을 수 없게 됐어. 이제 와서 혼약을 깨면 이 도성에서 누가 감히 너를 데려가겠어? 남의 여자를 데려갔다고 비웃음을 살 텐데, 두렵지도 않겠어?"
눈동자가 가늘게 흔들렸다.
한때 그토록 사랑했고, 칠 년이나 애타게 기다린 사람이었다. 내게 이런 말을 하다니.
눈에 맺힌 눈물을 보더니 서겸의 눈에 잠깐 안타까움이 스쳤다.
"연서야, 나를 곤란하게 만들지 마. 난영이가 칠 년 동안 얼마나 고생했는지 너는 몰라. 나라의 평안과 백성들을 위해 화친하러 간 거잖아. 그 정도는 너그럽게 이해해 줄 수 없어?"
바닥에 떨어진 비단을 주운 그가 내 손에 살며시 쥐여 주었다.
"도성에 오자마자 들었어. 너희 집에서 혼례 날짜를 사흘 뒤로 잡았다며. 내가 돌아오기도 전에 그렇게 서두른 건 마음을 바꿔 널 버릴까 봐서잖아."
"걱정하지 마. 나는 은혜를 저버리거나 이리저리 마음을 바꾸는 사내가 아니야. 사흘 뒤, 정실에 준하는 예로 너를 맞아들일게."
눈물이 잦아들고 차가운 웃음이 입가에 걸렸다.
"최서겸, 내가 사흘 뒤에 시집갈 사람이 너라고 누가 그래?"
그가 나를 빤히 보며 잠시 굳었다.
그러다 이내 웃었다.
"연서야, 그런 식으로 내 마음을 떠볼 필요 없어. 백령국에 있던 칠 년 동안 날마다 네 생각을 했어. 해마다 보낸 편지만으로도 내 마음이 전해지지 않았어? 사흘 뒤에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
말을 마친 서겸은 난영 모자의 손을 잡고 집을 나갔다.
눈을 감자 두 줄기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최서겸, 네 눈에는 난영이가 겪은 칠 년의 고생만 보이지. 그동안 너를 기다리며 내가 얼마나 울었는지는 알아? 그래도 이제 다 끝이야.'
...
이튿날, 어머니와 함께 아버지께 다과를 드리러 태학(太學: 나라에서 세운 최고 교육 기관)에 갔다가 밖에 멈춰 선 공주의 마차를 보았다.
서둘러 강당으로 들어가니 난영이 아이를 데리고 스승을 모시겠다고 찾아와 있었다.
그 스승이 바로 내 아버지였다.
"스승님께서는 제게 처음 글을 가르쳐 주신 분이십니다. 승원이도 문하에서 배울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겠습니다."
"더구나 따님을 참 잘 가르치셨습니다. 빈 혼인 서약서 한 장을 붙들고 칠 년을 기다리다 아무도 데려가지 않는 노처녀가 되어서도 서겸에게 시집가겠다고 하니 말입니다."
"이제 제가 정실이 되었으니, 첩으로라도 들어오겠다는 그 애틋한 마음을 모른 척할 수 있겠습니까?"
노골적인 모욕에 아버지의 꼿꼿하던 몸이 휘청했다.
그런데도 난영은 성에 차지 않는지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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