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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시간은 흘러간다제2화

이 화는 약 2734자. 본 사이트에서는 제1~3화를 미리 읽을 수 있습니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반짝이는 컨페티가 내 얼굴 위로 쏟아졌다.

알록달록한 컨페티들 사이로 송지욱이 다른 여자와 정신없이 입을 맞추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익숙한 얼굴의 친구들이 휴대폰을 들고 두 사람의 달콤한 순간을 기록하고 있었다.

그러나 내가 나타나는 순간, 그들의 낭만은 산산이 부서졌다.

나를 보자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 모두 헛숨을 들이켰다.

다들 황급히 시선을 피했고 아무도 나와 감히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여자는 송지욱을 힐끗 보더니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자기야, 저 사람도 자기 친구야? 그런데 왜 다들 갑자기 표정이 안 좋아진 거지?”

“민하야, 쟤는...”

나는 송지욱에게 대답할 기회조차 주지 않고 최민하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송지욱의 여자 친구예요.”

“두 사람이 8년 동안 사귀었다는 건 이미 알고 있어요. 하지만 나랑 송지욱은 12년을 만났어요.”

“믿기지 않는다면 내 휴대폰 앨범에 있는 영상을 보여줄게요.”

앨범을 클릭하자 지난 12년 동안 쌓아 온 추억들이 고스란히 사람들의 눈앞에 드러났다.

수능을 앞두고 열렸던 학교 행사에서 학생 대표로 발언했던 송지욱은 당시 공개적으로 내게 고백했다.

“사실 제 꿈은 명문대에 입학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한예서와 함께 미래를 만들어 가는 것도 제 꿈입니다.”

대학교 운동장에서 손을 맞잡고 산책하던 날, 송지욱은 갑자기 한쪽 무릎을 꿇고 1캐럿짜리 다이아몬드 반지를 내 약지에 끼워 주었다.

500만 원이 아주 많은 돈은 아니었지만, 가난한 대학생이었던 송지욱에게는 어렸을 때부터 열심히 저축해서 모은 전 재산이었다.

“나중에는 더 큰 걸로 해줄게.”

비좁은 월세방에서 송지욱은 술에 취한 채 나를 안고 엉엉 울다가 나한테 영상을 찍으라고 강요하더니 카메라 앞에서 맹세했다.

“이번 생에는 꼭 한예서를 호강시켜 주겠습니다.”

“평생 한예서만을 사랑할 것을 맹세합니다.”

회사의 상장을 축하하는 자리에는 친구들이 모두 모였다. 나와 송지욱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고, 친구들의 짓궂은 농담이 쉴 새 없이 이어졌다.

“야, 송지욱. 이제는 우리 예서랑 결혼해야 하는 거 아니야?”

송지욱은 카메라를 바라보지 않고 오로지 나만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말했다.

“할 거야. 신혼집은 지금 공사 중이야. 예서가 서른 살 생일을 맞으면 그때 혼인신고 하려고.”

오늘이 바로 내 서른 번째 생일이었다.

내 생일이자 혼인신고를 약속했던 바로 그날 말이다. 그러나 송지욱은 하루 종일 연락이 되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다른 여자와 함께 혼인신고를 하러 갔다.

마지막 영상이 끝났다.

넓은 룸 안은 숨소리마저 귀에 거슬릴 정도로 고요해졌다.

그 자리에는 내 절친과 지인들도 있었다.

그들은 나와 송지욱의 기나긴 연애를 지켜본 증인인 동시에 나를 배신한 자들이었다.

영상을 다 보고 나자 최민하는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때 송지욱이 마치 백마 탄 왕자처럼 앞으로 나서며 최민하를 자신의 뒤로 감추더니 비장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예서야, 그만해.”

“전부 내 잘못이야. 너에 대한 마음을 완전히 접지 못한 상태에서 미련하게 민하를 사랑하게 되었어. 너도 죄가 없지만 민하도 죄가 없어.”

“화가 난다면 나한테만 풀도록 해. 죄 없는 민하는 끌어들이지 마.”

최민하는 송지욱의 뒤에서 몸을 반쯤 내밀었다.

그리고 용기를 내어 나를 바라보며 아주 당당한 태도로 말했다.

“이런 일을 겪은 사람이라면 누구든 충격을 받을 거예요. 저는 그쪽 마음을 이해할 수 있어요.”

“하지만 지금 저랑 지욱이는 이미 혼인신고를 했어요. 지욱이는 제 남편이고 저는 지욱이 아내예요. 부부로서 우리는 모든 고난을 함께 이겨낼 거예요.”

“지욱이는 책임감이 강한 좋은 남자예요. 바라는 게 있다면 편하게 말해요. 우리가 최대한 돈으로 보상해 줄게요.”

보상?

12년 동안 만난 사람에게서 배신을 당한 내가 바라는 게 고작 금전적 보상을 해주겠다는 말 한마디였을까?

내가 화를 내려는데 정채린이 뜬금없이 헛기침을 해대면서 먼저 입을 열었다.

“예서야, 적당히 해. 사실 민하도, 지욱이도 잘못이 없어. 사랑이라는 게 원래 그런 거잖아. 누가 먼저였는지를 따지는 건 아무 의미 없어.”

“나는 네 가장 친한 친구니까 진심으로 충고하는 거야. 그냥 조용히 물러나. 그게 모두를 위한 일이야. 그리고 너도 금전적인 보상을 받을 수 있고 말이야. 괜히 소란을 벌여 봤자 좋을 게 없어. 혹시라도 일이 크게 번지면 앞으로 누가 너랑 결혼하려고 하겠어?”

나는 충격받은 표정으로 나의 가장 친한 친구를 바라봤다. 목이 꽉 막힌 것처럼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곧이어 송지욱의 누나, 그리고 나와 송지욱의 친구들도 나섰다.

“예서야, 너는 좋은 여자야. 하지만 민하는 너보다 더 좋은 사람이야. 조선 시대였다면 솔직히 너랑 민하 모두 내 동생이랑 함께 살기를 바랐을 거야. 하지만 요즘 세상에는 그럴 수가 없잖아. 지욱이도 결국에는 둘 중 한 명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어...”

“예서 언니, 제가 옆에서 지켜봤는데 지욱 오빠는 민하 언니를 진심으로 사랑해요. 그러니까 언니가 아니라 민하 언니랑 혼인신고를 했죠. 어차피 이렇게 돼버렸으니 그냥 지욱 오빠를 놓아줘요.”

송지욱과 최민하는 서로를 꼭 끌어안고 있었고, 다른 사람들은 마치 두 사람을 지키는 견고한 벽처럼 두 사람 뒤에 서서 나를 마주하고 있었다.

마치 내가 공공의 적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다.

나는 온몸의 기운이 빠져나가 더 이상 소란을 피울 힘조차 없었다.

그래서 약지에 끼고 있던, 이제는 빛이 바랜 다이아몬드 반지를 빼서 조용히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나는 반지와 함께 지난 12년간의 청춘과 사랑, 우정을 전부 그들에게 돌려주었다.

“알겠어.”

“내가 빠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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