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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내 낙태 동의서에 서명해 주었다제2화

이 화는 약 3047자. 본 사이트에서는 제1~3화를 미리 읽을 수 있습니다.

집 안으로 들어가 불을 켜자, 현관 선반 위에 고급스러운 요추 보호대가 놓여 있었다.

브랜드 이름을 확인한 나는 멍하니 서 있었다.

임신 초기, 허리 통증으로 고생할 때 갖고 싶어서 몇 번이고 인터넷 창을 열었다 닫았다 하던 제품이었다. 가격은 자그마치 100만 원이 훌쩍 넘는 고가였다.

허리가 끊어질 듯 아파 끙끙 앓을 때마다 도현에게 기대며 응석을 부렸었다.

그럴 때면 그는 나를 안아주고 이마에 입을 맞추며 말하곤 했다.

“조금만 참아, 자기도 금방 지나갈 거야.”

이제야 그걸 사 온 모양인데, 내겐 더 이상 필요 없는 물건이었다.

나는 쇼핑백을 집어 거실 구석 수납장 깊숙이 밀어 넣었다.

대충 몸을 씻고, 평소처럼 도현을 기다리기 위해 스탠드를 켜두는 대신, 모든 불을 끄고 곧바로 침대에 누웠다.

깜빡 잠이 들었을 무렵, 누군가 내 어깨를 거칠게 흔들어 깨웠다. 귀가 먹먹할 정도로 다급한 목소리가 내리꽂혔다.

“이지수, 현관에 둔 쇼핑백 어디 갔어? 당신이 치웠어?”

억지로 잠에서 깨어나니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왔다.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웅얼거렸다.

“무슨 쇼핑백...?”

도현의 목소리에 짜증이 가득 묻어났다.

“요추 보호대 말이야! 내가 서아 주려고 사 온 거, 당신이 가로챈 거냐고.”

“서아가 임신 초기라 허리가 끊어질 것처럼 아프다잖아. 당신은 형님이라는 사람이 왜 매번 서아 물건을 탐내?”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 역시 내 것이 아니었구나.

나는 그의 싸늘한 원망이 담긴 시선을 받아내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수납장 앞으로 걸어가 허리를 굽혀 쇼핑백을 꺼냈다. 그리고 그에게 아무 말 없이 내밀었다.

“안심해. 손도 안 댔으니까.”

예전 결혼기념일 날, 도현은 은색 벚꽃 모양 목걸이를 사 들고 온 적이 있었다.

당연히 내 선물인 줄 알고 설레는 마음으로 목에 걸어보았고, 샤워를 마치고 나오는 그에게 자랑스레 보여주며 물었다.

“어때, 예뻐?”

하지만 그의 얼굴은 순식간에 차갑게 굳어버렸다.

“당장 빼. 당신 거 아니야.”

멍하니 굳어 있는 내 반응이 답답했는지, 도현은 거칠게 내 목에서 목걸이를 낚아챘다. 얇은 체인이 피부를 긁고 지나가며 빨간 피막이 내려앉았다.

그제야 미안해진 그가 내 목덜미에 약을 발라주었을 때, 나는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다 물었다.

“그 목걸이, 누구 주려고 산 거야?”

그의 눈빛은 마법처럼 다시 부드러워지며 미소를 띠었다.

“서아 주려고. 전부터 갖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거든. 내 반년 치 보너스 다 털었어.”

나는 더 이어질 말을 기다렸지만, 그는 침묵했다. 결국 내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오늘 우리 결혼기념일인데, 내 선물은 없어?”

그는 아차 싶었는지 가방을 뒤적거리더니 핑크색 머리핀 하나를 툭 던져주었다.

“자, 이거 당신 거야.”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그 핀은 목걸이를 살 때 끼워준 사은품이었다는 것을.

서아가 마음에 안 든다고 거절해서 내 손에 들어온 쓰레기였다.

사랑과 무관심의 차이는, 늘 그렇게 사소한 틈새에서 드러나는 법이다.

회상에서 깨어나기도 전에 내 손에 종이 쇼핑백 하나가 쥐어졌다.

요추 보호대를 챙긴 도현이 나를 거실 소파로 이끌었다.

“비 맞았다며. 이거 마시고 몸 좀 녹여. 오는 길에 특별히 사 온 생강차야.”

나는 쇼핑백을 테이블 위에 올려두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생각 없어.”

도현은 기어코 포장을 뜯어내며 나무랐다.

“임신 중이잖아. 투정 부리지 말고 마셔. 아이를 생각해서라도.”

내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내 배는 이미 전보다 확연히 가라앉아 있었다. 하지만 도현은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결혼 초기에는 내 손가락에 작은 가시 하나만 박혀도 세상이 무너질 것처럼 굴던 남자였다. 소독약을 바르고 연고를 찾느라 호들갑을 떠는 통에, 상처가 다 아물 지경이었다.

그 모습이 웃겨 그의 등 뒤에 매달려 장난을 치면, 그는 나를 품에 꼭 안아주며 속삭였다.

“너에 관한 일인데 어떻게 대충 넘어가? 내가 널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잖아.”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서야 깨달았다. 남자의 달콤한 말은 전부 껍데기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에게는 오랜 시간 함께 자란 첫사랑이자 입양 여동생이 있었다. 부모님의 반대로 억지로 헤어지기 전까지 두 사람은 8년 동안 비밀 연애를 했다고 들었다. 나라는 존재는 그저 그의 상처를 덮기 위한 대체품일 뿐이었다.

따뜻한 김이 피어오르는 생강차가 내 손에 쥐어졌다.

“식기 전에 얼른 마셔.”

말다툼하기 싫어 머그잔을 들어 몇 모금 삼켰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몸에서 이상 반응이 일어났다.

목구멍이 좁아지며 숨을 쉬기가 힘들어졌고, 팔과 목덜미에 붉은 두드러기가 사정없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나는 다급하게 도현의 소매를 움켜쥐었다.

“여기에... 뭘 넣은 거야?”

도현 역시 사색이 되어 허둥댔다.

“그냥 흑설탕이랑 생강만 넣었는데... 왜 그래? 여보, 왜 그래?!”

“119, 그래, 구급차 부를게. 지수야, 정신 차려봐. 제발 아무 일도 없어야 해...”

도현은 눈시울을 붉히며 사시나무 떨듯 떨리는 손으로 나를 껴안았다.

흐릿해지는 정신 속에서 문득 깨달았다. 그가 나를 위해 이렇게 가슴 졸이고 불안해했던 적이 대체 언제였던가.

구급차가 도착하고, 나는 들것에 실려 나갔다.

도현이 보호자 동승을 위해 차에 오르려던 찰나, 그의 주머니에서 벨 소리가 울렸다. 서아의 전용 벨 소리였다.

그는 단 1초 망설이더니 결국 전화를 받았다.

수화기 너머로 서아의 울부짖음이 들려왔다.

“오빠, 칼에 손목을 베였어... 피가 너무 많이 나. 무서워, 빨리 와줘...”

도현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몸을 돌렸다. 구급차 반대 방향으로 뛰어가며 다급하게 속삭였다.

“지금 갈게, 서아야! 울지 말고 상처 꾹 누르고 있어!”

구급대원들의 외침도, 산소마스크를 쓴 채 헐떡이는 내 비참한 모습도 그를 붙잡지 못했다.

심각한 아나필락시스 쇼크로 나는 중환자실(ICU)로 이송되어 밤새 산소호흡기에 의지해야 했다.

다음 날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보인 것은 눈물이 그렁그렁한 엄마의 얼굴이었다.

내가 깨어난 것을 본 엄마는 안도하며 내 이마를 짚었다.

“병원에서 연락받고 엄마 심장이 내려앉는 줄 알았다. 너 땅콩 알레르기 있는 거 모르는 사람도 없는데, 평소에 그렇게 조심하던 애가 어쩌다 그걸 먹었어?”

대답하려던 순간, 병실 문이 거칠게 열렸다. 도현이 눈가가 붉게 충혈된 서아의 손을 잡고 들어서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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