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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내 낙태 동의서에 서명해 주었다제1화

이 화는 약 2826자. 본 사이트에서는 제1~3화를 미리 읽을 수 있습니다.

산부인과로 정기 검진을 가던 날, 나는 도현을 마주쳤다.

아침까지만 해도 회사에 급한 일이 있다며 핑계를 대고 집을 나섰던 남자가, 지금은 임신한 입양 여동생의 곁을 지키며 지극정성으로 보살피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다가가 종이 한 장을 내밀며 말했다.

“마침 잘 만났네. 여기 사인해 줘.”

양심에 찔리는 구석이 있었는지, 그는 내용을 확인하지도 않은 채 서둘러 서명을 하고 나서야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았다.

“제부가 출장 중이라 서아가 혼자 검진받기 힘들대서 왔어. 당신이 또 예전처럼 예민하게 굴까 봐 회사 일 핑계 댄 거야.”

이제 막 임신한 서아의 발걸음은 걱정되면서, 임신 5개월 차인 내가 혼자 병원을 찾는 것은 아무렇지도 않은 남자.

실소가 터져 나왔다. 하지만 예전처럼 악을 쓰며 화를 내지는 않았다. 그저 묵묵히 몸을 돌렸을 뿐이다.

나의 비정상적인 차분함에 당황했는지, 도현이 다급하게 내 뒤를 쫓아오며 물었다.

“참, 방금 사인하라고 한 거, 무슨 서류야?”

나는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대답했다.

“임신중절 수술 동의서.”

……

* * *

도현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그가 무어라 입을 열기도 전에, 서아가 그의 팔을 꼭 껴안았다.

서아는 가당치 않다는 듯 눈살을 짓푸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새언니, 도현 오빠가 나랑 같이 병원 와서 화난 건 알겠는데, 어떻게 그런 걸로 농담을 해?”

늘 그래왔듯, 도현은 서아의 말 한마디에 무조건적인 신뢰를 보냈다.

찌푸려졌던 그의 미간이 스르르 풀리며, 나를 향한 지긋지긋한 질책의 시선으로 바뀌었다.

“지수야, 제발 억지 좀 부리지 마. 서아 검사 끝나는 대로 바로 집으로 갈 테니까.”

5년. 1,825일 동안 이런 식의 말을 삼천 번은 넘게 들었을 것이다.

연애 1주년 기념일에는 서아와 여행을 다녀온 뒤에 나와 정동진으로 일출을 보러 가자고 했었다.

결혼 후 맞이한 내 첫 생일날에는 서아의 쇼핑을 도와주고 나서 생일 파티를 해주겠다고 약속했었다.

퇴근길에 교통사고를 당해 구급차에 실려 병원에 갔을 때조차, 그는 서아의 열이 내리면 병원으로 가겠다고 했다.

하지만 그의 약속은 단 한 번도 지켜진 적이 없다.

서아는 늘 새로운 핑계로 그를 불러냈고, 도현의 우선순위에서 나는 언제나 그녀보다 뒤처져 있었으니까.

나는 손에 쥔 수술 동의서를 꽉 움켜쥐고, 산부인과 진료실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대기실 의자에 앉아 내 차례를 기다리는 동안, 조심스레 배 위에 손을 얹었다.

마음속으로 마지막 다짐을 했다. 정말 딱 한 번만, 그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겠노라고.

수술실에 들어가기 전까지 그가 나를 찾아온다면, 이 아이를 지키겠다고.

시간은 야속하게 흘러갔고, 마침내 대기 스피커에서 내 이름이 울려 퍼졌다.

“32번 환자분, 이지수 님. 진료실로 들어오세요.”

기계적인 음성이 세 번 반복되는 동안, 하얗고 긴 병원 복도 어디에서도 내가 그토록 기다린 익숙한 실루엣은 보이지 않았다.

자조 섞인 웃음이 흘러나왔다.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손가락에 끼워져 있던 결혼반지를 빼서 쓰레기통에 미련 없이 던져버렸다.

그리고 휴대폰의 예약 메시지 전송 버튼을 눌렀다.

수술 동의서 사진 한 장과, 회사 인사팀에 보내는 짧은 메일이었다.

[미국 지사 파견 근무를 자원합니다.]

……

하늘이 어스름하게 내려앉았을 즈음, 모바일 메신저로 메시지가 도착했다.

[왜 이렇게 늦어? 아직 안 들어왔어?]

아랫배를 움켜쥔 채, 창백해진 얼굴로 택시를 잡아타며 답장을 보냈다.

[지금 가는 중이야.]

택시 기사님은 넉살이 좋은 분이었다. 거울로 내 안색을 살피더니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학생, 병원에서 나오는 길인 것 같은데 얼굴이 너무 안 좋네. 보호자는 같이 안 왔어요?”

내가 차창에 머리를 기대며 대답했다.

“바빠서요. 시간이 안 되나 봐요.”

서아가 부를 때면 자다가도 뛰어나가던 남자였다.

야근을 마치고 돌아오던 밤, 낯선 남자가 뒤를 밟는 것 같아 공포에 떨며 그에게 데리러 와달라고 전화를 걸었을 때, 그는 바쁘다며 택시를 불러줄 테니 타고 오라고 했었다. 가로등도 밝고 길에 사람도 많은데 유난 떨지 말라면서.

그날 이후로 나는 그에게 단 한 번도 데리러 오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기사님은 혀를 차며 내 남편에 대해 불만을 토로했다.

“아무리 바빠도 그렇지, 아픈 사람을 이 밤중에 혼자 보내나...”

나는 그저 쓸쓸히 미소 지을 뿐, 대꾸하지 않았다.

차창 밖으로 빗방울이 번지기 시작하더니, 가로등 불빛이 흐릿하게 흐트러졌다.

아파트 단지 입구에 도착할 무렵, 도현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갑자기 비가 오네. 우산이 없는데 아파트 정문 앞으로 마중 나와 줄 수 있어?]

답장은 의외로 빨리 왔다.

[알았어. 금방 나갈게.]

택시가 정문에 멈추자, 기사님께 잠시만 기다려 달라고 양해를 구했다.

하지만 1분, 2분... 그렇게 30분이 흐르도록 도현은 나타나지 않았다.

휴대폰을 들어 전화를 걸었다. 일곱 번이나 신호음만 가다 끊겼다.

여덟 번째 시도 끝에 마침내 그가 전화를 받았다.

“어디야?”

그의 목소리는 뻔뻔할 정도로 태연했다.

“천둥 번개가 쳐서 서아가 너무 무섭다고 울잖아. 서아 집에 와 있어.”

“그럼 난 어떻게 들어가라고?”

수화기 너머로 서아의 찢어지는 듯한 비명이 들렸고, 도현의 신경은 순식간에 그쪽으로 쏠렸다.

그는 내 말을 들을 시간조차 없다는 듯 다급하게 쏘아붙였다.

“당신은 평소에 건강하니까 비 좀 맞아도 괜찮잖아. 집으로 들어갈 때 생강차 사 갈 테니까 그거 마셔...”

‘마셔’라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통화가 툭 끊겼다.

기사님의 눈빛이 깊은 동정으로 물들었다. 기사님은 뒷좌석으로 낡은 우산 하나를 건네며 말씀하셨다.

“학생, 이거 쓰고 가요. 얼른 들어가서 쉬어.”

휴대폰을 움켜쥔 손가락 끝이 하얗게 질렸다. 가슴 한구석이 짓눌린 듯 먹먹하게 아파왔다.

나는 조용히 우산을 받아 들고, 기사님께 몇만 원을 더 얹어 요금을 결제한 뒤 차에서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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