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죽은 내가 화면에 나타났다제2화
이 화는 약 2692자. 본 사이트에서는 제1~3화를 미리 읽을 수 있습니다.
해연국은 춥고 척박했다.
군사도 강하고 말도 건장했지만 곡식도 약도 모자랐다.
나는 해연국 왕에게 바친 서령국의 벙어리 노비라는 신분으로 탁수철의 군막에 던져졌다.
그때의 탁수철은 내란을 갓 평정했던 때라 두 손에는 피비린내가 가득했다. 웃는 것조차 칼날을 목에 대는 것처럼 살벌하게 느껴졌다.
시스템이 내게 준 임무는 아주 간단했다.
“해연국의 군수 장부를 손에 넣고, 서령국과의 곡식과 말 교역로를 뚫으세요.”
나는 그 자리에서 핵심을 물었다.
“어떻게 손에 넣으라는 말입니까?”
시스템은 간단하게 대답했다.
“알아서 하세요.”
알아서 한 결과, 나는 반년 동안 벙어리 행세를 했다.
탁수철이 군사를 논할 때면 나는 곁에 꿇어앉아서 화로에 숯을 넣었다.
그리고 탁수철이 병사를 점호할 때면 나는 눈보라 속에 서서 등불을 들었다.
탁수철의 장수들이 나를 서령국이 보낸 폐물이라고 비웃었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숙인 채, 장수들이 말한 곡식 창고의 위치, 교대 시각과 마장의 결함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외웠다.
집안 배경이 좋은 해연국의 후궁들은 나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 여인들은 나를 얼음 창고에 가둔 뒤, 얼어 죽기 전에 책 세 권을 다 베끼라고 핍박했다.
손가락에 감각이 사라질 무렵 시스템이 머릿속에서 비명을 질렀다.
“바이탈이 떨어집니다. 숙주님, 지금 구원을 청하지 않으면 죽습니다.”
나도 구원을 청하고 싶었다.
그러나 벙어리라는 설정을 무너뜨릴 수는 없었기에, 마지막 힘을 짜내서 서릿발 위에 두 글자를 썼다.
[곡식]
탁수철이 얼음 창고 문을 걷어차고 들어오자마자 본 건 바로 그 글자였다.
곧 탁수철은 나를 안아 들고 나갔다.
겉옷으로 나를 단단히 감쌌지만 눈빛은 무섭도록 어두웠다.
“얼어 죽게 생겼으면서 아직도 곡식 생각입니까?”
말을 할 수 없던 나는, 붉어진 두 눈으로 그저 탁수철을 바라보기만 했다.
하늘 댓글창이 여기까지 흘렀을 때, 한순간 잠잠해졌던 해연국의 댓글들이 곧 빽빽하게 올라오기 시작했다.
[저 여자, 그때 총애를 받았던 그 여자 아닌가?]
[그해에 교역이 열려서 해연국이 목숨 살리는 약재를 받아왔던 게 기억나는데.]
[그래도 나중에 왕의 옥패를 들고 튀었잖아! 이것도 감싸 줄 셈이야?]
당연히 감쌀 수 없었다.
나는 정말로 달아났기 때문이었다.
반년 뒤, 나는 교역이 열린 틈을 타서 해연국이 원하는 군수품, 군수의 결함, 그리고 왕후의 옥패를 모두 챙겨서 서령국으로 돌아왔다.
떠나기 전, 나는 설원에 거짓 현장을 만들어 다들 내가 죽었다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마차 한 대가 얼어붙은 강으로 떨어졌다. 그 안에는 내 여우털 외투와 피 묻은 옷, 그리고 부서진 옥비녀가 있었지만 시신은 없었다.
탁수철은 무려 7일 동안 그 강가에서 나를 찾았다.
8일째 되던 날, 탁수철은 강가에서 자기를 막아서는 나무를 전부 자신의 손으로 베어 버렸다.
하늘 댓글창은 이 장면을 천천히 보여주었다.
눈보라가 울부짖는 가운데, 사내의 온몸에는 핏자국이 가득했다. 잔뜩 갈라진 목소리는 사람의 것 같지 않았다.
“공주, 살아 있다면 내게 한 번만 보여주세요.”
나는 배정호의 서재에 선 채, 한때 무쇠처럼 차갑게 굳어 있던 탁수철의 두 눈이 조금씩 붉게 물드는 모습을 보았다.
그 모습을 보자, 가슴 한구석이 순간 찡했다. 배정호는 곁눈질로 슬쩍 나를 보았다.
“그래서 해연국의 그 교역로는 이렇게 얻어진 것입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배정호의 시선이 내 소맷자락으로 떨어졌다.
“왕후의 옥패는요?”
나는 소매를 더 꽉 눌렀다.
“제가 가지고 있습니다.”
배정호의 눈빛에 싸늘한 기색이 더 짙어졌다.
“좋습니다. 계속 보죠.”
제2막은 월진국이었다.
해연국의 칼이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월진국의 돈은 사람을 묻어 버릴 수 있었다.
어린 나이에 즉위한 월진국의 왕 서강호는 천하에서 가장 값진 조운 시스템과 전장들을 손에 쥐고 있었다.
서강호가 평생 가장 미워하는 것은 두 가지였다.
첫째, 빚지고 돈을 갚지 않는 자.
둘째, 자기 돈을 속여서 취하는 자.
아주 공교롭게도 나는 두 가지를 다 저질렀다.
내가 월진국에 갔을 때의 신분은 몰락한 상인 집안의 눈먼 딸이었다.
시스템은 내 눈을 가려 주고, 터무니없이 진부한 전개를 하나 마련해 주었다.
“미행 중인 월진국 왕을 구하고, 왕실 상인의 집안에 시집을 가서 수상운수 금패를 얻으세요.”
시스템의 말을 듣자마자 내 표정이 썩으면서 그 자리에서 박차고 나오고 싶었다.
“시집을 안 가면 안 됩니까?”
시스템은 냉혹하고 무정했다.
“감정 전환 점수가 모자라면 오늘 밤 서령국의 성 세 곳에서 식량이 끊깁니다.”
나는 그 자리에서 입을 다물었다.
서강호가 나를 처음 본 것은 임수강 나루터에서였다.
나는 낡은 주판 하나를 안고 사람들 틈에 서서, 늙은 뱃사공이 떼인 품삯을 대신 셈해 주고 있었다.
눈은 보이지 않는데 주판알은 나는 듯이 튕겼다.
서강호는 그런 내가 재미있다고 칭찬했고, 나는 서강호가 돈이 많다고 칭찬했다.
그 뒤 서강호는 나를 궁으로 데려가서 장부를 살피게 했다.
나는 횡령 세 건을 찾아내서, 탐관오리들이 빼돌린 은자를 되찾아 주었다.
서강호는 매우 기뻐하며 내게 작은 누각 하나를 하사했다.
나도 무척 기뻤다.
그 누각 아래가 마침 월진국 수운국의 창고와 이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하늘 댓글 창 속의 나는 지독하게 다정했다.
서강호가 밤에 상소를 결재하면 나는 등불 아래 앉아서 남자를 위해 차를 달였다.
이어 서강호가 내 눈 위의 흰 비단을 만지작거렸다.
“만월, 그대의 눈이 낫는다면 제일 보고 싶은 것이 무엇입니까?”
나는 찻잔을 받쳐 든 채, 정말로 약간의 설렘이 실린 듯 가벼운 소리로 답했다.
“전하의 얼굴을 보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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