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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죽은 내가 화면에 나타났다제1화

이 화는 약 2421자. 본 사이트에서는 제1~3화를 미리 읽을 수 있습니다.

나는 서령국의 유일한 공주다.

하늘에 화면이 열린 뒤로, 여러 나라의 사람들이 나를 보는 눈빛이 하나같이 심상치 않아졌다.

“공주, 나와 함께 해연국으로 돌아갑시다.”

해연국 왕이 서슬이 시퍼런 칼을 든 채 눈꼬리를 붉혔다.

“짐의 황금을 실은 배 세 척을 속여서 꿀꺽하셨는데 무엇으로 갚으시겠습니까?”

월진국 왕은 주판을 튕기며 한 걸음씩 다가왔다.

“공주께서는 죽는 것까지 나를 속이셨습니다...”

청운국 세자 또한 피를 토하면서도 내 손목을 놓지 않았다.

나는 머리가 쭈뼛 서면서, 방금 비밀 서랍에서 훔친 옥패를 꽉 쥐고 달아날 채비를 했다.

그런데 누군가 문을 느긋하게 닫아 버렸다.

서령국의 섭정왕이자 대군인 배정호가 나를 서재에 가둔 채 서 있었다.

나를 바라보는 그 눈매는 서늘했고, 눈빛은 칼날처럼 모든 것을 꿰뚫어 볼 것만 같았다.

“공주, 다른 사람의 빚을 다 갚으셨으면, 이제 제 물건을 훔친 값을 치르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 * *

하늘 댓글창이 열리기 직전에, 서령국의 유일한 공주인 나는 섭정왕인 대군 사저에서 물건을 훔치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배정호의 옥패를 훔치는 중이었다.

어두운 청색의 그 옥패에는 서령국 국고의 비밀 지도가 새겨져 있었다.

대군 사저와 왕실이 함께 재산과 식량을 관할한다는 증표였다.

배정호는 그것을 책상의 셋째 칸 비밀 서랍에 숨겨 두었다.

배정호가 입궐해서 정사를 논하는 틈을 타서, 나는 책상 앞에 쭈그리고 앉은 채 자물쇠를 땄다.

자물쇠가 열리자마자 하늘 댓글창이 밝아졌다. 내가 옥패를 제대로 챙기기도 전에 누군가 서재의 문을 밀면서 열었다.

배정호가 문가에 서 있었다.

하얀 옷에 칠흑 같은 검은 머리, 게다가 눈매까지 싸늘해서 저승사자가 강림한 줄 알았다.

배정호의 시선이 먼저 내 손의 옥패에 떨어졌다가 다시 허공을 바라봤다.

하늘 댓글창은 마침 네 칸으로 나뉘어 있었다.

첫째 칸에서는 해연국의 여우가죽 외투를 걸친 내가 해연국 왕 탁수철의 군막에 앉아서, 눈을 내리깐 채 남자를 위해 칼을 갈고 있었다.

둘째 칸에서는 흰 비단으로 눈을 가린 내가 월진국 물가의 정자에서 주판 옆에 기댄 채, 부드러운 목소리로 월진국 왕 서강호를 ‘서방님’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셋째 칸에서는 검은색 옷을 입은 내가 청운국 세자 조윤헌의 침상 앞에 무릎을 꿇고, 피를 토하면서 목숨으로 지키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넷째 칸은, 바로 지금 이 순간의 나였다.

왼손에는 옥패를 오른손에는 철사를 들고서 서령국 대군의 서재에 쭈그리고 앉은 채, 도둑질하다 들킨 얼굴을 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배정호는 나를 한참 바라보았다.

그 자리에서 끌려 나가서 내 목을 베겠구나 싶을 만큼 꽤 긴 정적이었다.

그러다 배정호가 문득 웃음을 흘렸다.

“공주님께서 정안사에 기도하러 가시더니, 해연국의 왕후, 월진국의 왕실 상인에 청운국의 호위무사까지 되셨습니까?”

“게다가 제 사저의 자물쇠를 따는 재주까지 있으시다니 참으로 대단하십니다.”

나는 말없이 옥패를 소매 안으로 더 밀어 넣었다.

그러나 하늘 댓글창은 이미 댓글로 도배되고 있었다.

[해연국 사람: 저건 우리 왕께서 3년을 애타게 기다리신 설화 왕후이잖아? 아직도 안 죽었어?]

[월진국 사람: 왕후는 무슨 얼어 죽을 왕후! 저 여자는 우리 왕의 황금을 실은 배 3척을 속여서 꿀꺽한 눈먼 아내야!]

[청운국 사람: 다들 비켜! 저분은 우리 세자 저하의 죽은 아내이자 호위무사야! 위패가 아직 동궁에 모셔져 있단 말이야!]

[서령국 사람: 잠깐! 그러니까 우리 공주가 요 몇 년 동안 궁에 없었던 게, 밖에 나가서 물건 떼러 다닌 거였어?]

배정호가 손가락 마디로 문을 가볍게 두드렸다.

“심연화.”

배정호는 좀처럼 내 성과 이름을 함께 부르지 않았다.

그렇게 부를 때면 나는 곧 끝장이라는 뜻이었다.

나는 애써 어색한 웃음을 지으면서 변명했다.

“대군 자가, 제가 설명할 수 있습니다.”

배정호가 눈을 내리깔고 나를 바라보았다.

“좋습니다.”

배정호가 느긋하게 문을 닫았다.

“저 화면보다 빠르게 설명하시는 편이 좋을 겁니다.”

내가 막 입을 떼려는데, 하늘 댓글 창에서 시스템의 달콤하고도 차가운 소리가 흘러나왔다.

“국운 구제 회고를 정식으로 시작합니다.”

“제1막, 해연국 편.”

‘끝났어.’

저것이 나보다 빨랐다.

내가 이 책 속으로 들어왔을 때 서령국은 이미 상상을 뛰어넘을 정도로 가난했다.

궁궐 지붕은 비가 샜고 호부 창고에서는 쥐가 뛰어다닐 정도였다. 조정의 문무백관은 제비를 뽑아서 녹봉을 받아야 했다.

당첨된 자는 묵은 쌀 반 자루를 먼저 받았지만, 당첨되지 못한 자는 관인이 찍힌 차용증 한 장만 받았다.

내가 깨어난 첫날, 시스템창에 임무가 떴다.

“숙주님에게 해연국 국운 구제 임무를 부여합니다. 3년 안에 해연국이 망하면 숙주님도 함께 묻힙니다.”

“해연국이 흥하면 숙주님은 2조 원의 자산을 가지고 원래 있던 세계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그렇게 긴 문장 속에서도 난 2조 원라는 글자만 귀에 들어왔다.

난 그 자리에서 병상을 박차고 일어났다.

“네.”

그 시원시원한 태도에 시스템은 아주 흡족했는지 나를 해연국으로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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