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회로 얼룩진 그림자제1화
이 화는 약 3316자. 본 사이트에서는 제1~2화를 미리 읽을 수 있습니다.
내 목숨 걸고 낳은 아들이 식탁 위에서 갑자기 러시아어로 말했다.
“아빠, 우리 엄마가 잠들어야 이서 아줌마를 만나러 갈 수 있죠?”
그리고 평생 나만 사랑하겠다고 약속했던 재벌 남편은 러시아어로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지. 절대 엄마한테 들키면 안 돼.”
아들과 남편이 눈빛을 주고받으며 미소를 짓는 걸 보며, 나는 가슴이 찢어질 듯 아픈데도 억지로 웃으며 반찬을 집어주었다.
그들은 몰랐다. 사실 나는 러시아어에 능통하다는 걸.
그리고 나는 이미 그들이 밖에서 또 다른 가정을 꾸렸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나는 이미 그들을 떠나기로 결심했기 때문이다.
“시스템, 나를 집으로 데려가 줘.”
* * *
시스템이 빠르게 나타났다.
“호스트, 일주일 후에 데리러 올게요. 이번 한 주는 이 세계의 가족과 작별할 시간을 드릴게요”
익숙한 기계음이 울려 퍼졌다. 나는 순간 멍해졌다가, 창백한 얼굴로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기다릴게.”
돌아보니 벽에 걸린 가족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사진 속 아빠와 아들이 나를 꼭 안고 있었다.
‘지금쯤 똑같은 자세로 다른 여자를 안고 있겠지...’
한때는 자랑스럽기만 했던 이 가족사진이 지금은 내 가슴을 찌르는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버렸다.
나는 가족사진과 결혼사진을 모두 떼어내어 지하실에 잠갔다.
그리고 집안 곳곳을 뒤져가며 우지우가 나를 위해 마련한 모든 물건을 정리했다.
커다란 상자 열여섯 개가 꽉 찼고, 거의 집을 비울 정도였다.
나는 밤새 이삿짐센터에 연락해 물건을 보관해달라고 부탁하며 추가로 전해달라고 했다.
“일주일 후에 이 물건들을 이 사람에게 꼭 전달해주세요.”
유이서가 몇 번이고 내 앞에서 우지우가 남긴 흔적을 자랑하듯 보였던 모습이 떠올라 덧붙였다.
“전달할 때 꼭 말해주세요. 우지우가 산 물건들뿐만 아니라 걔랑 걔 아들도 전부 당신에게 드린다고.”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우지우가 아들을 데리고 문 앞에 나타났다.
“재이야, 뭘 준다고?”
아들 우지후가 사탕 한 움큼을 들고 내게 달려왔다.
“엄마, 왜 안 웃어? 내가 사탕 줄게.”
우지우는 텅 빈 거실을 둘러보며 당황한 표정으로 물었다.
“재이야, 내가 준 물건들 다 버렸어?”
나는 고개를 숙이며 대충 대답했다.
“기부했어... 복지관에.”
예전 같았으면 우지우는 왜 갑자기 기부를 했는지 혹시 내가 무슨 불만이 있는지 물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그는 단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잘했네. 그러면 내가 새로 사줄게.”
우지후도 내게 달라붙어 엄마가 정말 착하다고 칭찬하며 벽에서 가족사진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밤이 되자 그들은 여전히 전과 다름없이 한쪽씩 내 옆에서 애정을 다투며 달라붙었다.
“엄마 뽀뽀하지 마요! 엄마는 내 거예요!”
“네 엄마는 내 와이프거든? 네가 내 와이프를 독차지하려고 해?”
하지만 이제 나는 예전처럼 행복하지 않았다.
그 속에서 진실하지 않은 냄새가 났기 때문이다.
그들이 내 옆에 있어도 마음은 다른 여자에게 향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결국 내가 잠든 척하고 있을 때 우지우의 핸드폰이 급하게 울렸다.
눈을 살짝 뜨고 보니 화면에 “유이서”라는 이름이 선명히 떠 있었다.
가슴이 얼음구덩이에 빠진 듯했지만 우지우는 내가 자고 있다고 안심하며 아들을 데리고 방을 나섰다.
문 너머에서 유이서의 애교 섞인 울음소리가 들렸다.
“여보, 나 정말 보고 싶어. 오늘도 나랑 같이 있어주면 안 돼?”
우지우는 다정하게 그녀를 달래며 말했다.
“매일 밤 같이 있잖아. 그렇게 나 없으면 못 살겠어?”
유이서의 목소리는 더욱 처량하게 들렸다.
“여보, 나 정말 당신을 사랑해... 당신한테 명분을 요구하지도 않을게. 사모님과 다투지도 않을게. 그냥 조금 더 자주 같이 있고 싶어. 나를 이렇게 혼자 둘 거야?”
그 간드러진 목소리는 내 아들의 마음까지 움직였다.
아들은 러시아어로 아빠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오늘도 이서 아줌마랑 같이 자고 싶어요. 아빠, 우리 가요.”
내가 열 달 동안 힘겹게 낳은 아들이 이제는 내 가정을 무너뜨린 여자를 걱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문 너머에서 조용히 눈물을 흘리는 나를 아무도 위로해주지 않았다.
나는 얼굴을 이불 속에 파묻고, 누구에게도 나의 약함과 처참함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십 년 전, 나는 우연히 책 속 세계로 들어와 거기서 재벌 회장 우지우를 공략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시스템이 준 보상을 들고 떠나려는 순간 우지우는 미친 사람처럼 내게 사랑을 고백했다.
수백억 원짜리 집을 아무렇지 않게 사들이고, 내 이름이 적힌 집문서를 여러 개 내 손에 쥐여주었다.
매일 밤, 우지우는 나를 꼭 껴안고, 수없이 반복되는 “사랑해”라는 말 속에서 잠들게 했다.
아침에 눈을 뜨면 그의 깊은 눈빛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들을 낳을 때 나는 불행히도 난산을 겪었다.
타고난 혈흔 공포증이 있는 우지우는 그 모든 것을 무릅쓰고 분만실로 뛰어들어왔다.
내 옆에 무릎을 꿇고 연신 머리를 조아리며 기도하듯 나를 응원했다.
그렇게 우리의 아들 우지후를 무사히 낳았다.
우지후는 우지우를 보고 자라면서 나를 향한 작은 연인 같은 존재가 되었다.
매일 아침이면 장미꽃을 내게 건네고, 밤에는 아버지와 경쟁이라도 하듯 나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나는 한때, 임무 세계에 남는 것이 내가 내린 최고의 선택이라 믿었다.
하지만 이 부자는 나를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으로 착각하게 만든 동시에 강씨 집안의 오래된 가정부 딸 유이서와 함께 새로운 아늑한 가정을 꾸리고 있었다.
수많은 밤, 내가 잠든 틈을 타서 그들은 몰래 나가 유이서를 만나러 갔다.
가짜 사랑은 이제 필요 없다.
매일밤 집에 들어오지 않는 이 부자도 더 이상 필요 없다.
한숨도 못 자고 보낸 밤이 지나고, 다음 날 아침 우지우는 여전히 서툰 변명을 늘어놓으며 말했다.
“오늘 중요한 고객을 접대해야 해서, 아침에 일어나면서 지후를 학교에 데려다줬어. 그래서 일부러 너를 깨우지 않았어.”
나는 답장조차 하지 않고, 차갑게 메시지를 삭제한 뒤 가까운 화장터로 향했다.
“저를 화장해 주세요.”
직원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내가 제정신이 아니라고 여겼다.
나는 자세한 설명 대신 거액의 돈을 건네며 말했다.
“6일 후, 이 시간에 저택으로 제 시신을 수습하러 와 주세요.”
“그럼 나중에 유골은 사랑하는 분이나 가족에게 전달해 드릴까요?”
나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저에겐 사랑하는 사람도, 가족도 없습니다. 유골은 바다에 뿌려주시면 돼요.”
직원들의 표정은 순간적으로 충격에서 깊은 연민으로 바뀌었다.
그들의 눈에는 내가 불치병에 걸려 죽음을 앞둔 불쌍한 여자로 보였을 것이다.
마지막 순간 스스로의 장례를 준비하는 사람처럼 말이다.
하지만 진실은 내가 이 세계에서 완전히 죽어야만 시스템을 따라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떠나기 전 이루고 싶은 가장 큰 소원은 우지우와 우지후가 나를 애도할 장소조차 찾을 수 없게 만드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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