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한 독립제1화
이 화는 약 3492자. 본 사이트에서는 제1~3화를 미리 읽을 수 있습니다.
한소원과 배민혁은 11년이라는 긴 시간을 함께해 왔다.
이 남자와 검은 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함께하리라 믿고 있을 때 배민혁이 바람을 피웠다.
그것도 3년이나...
한소원과 얼굴이 많이 닮았지만, 더 젊고 어린 여자에게 빠져버린 것이다.
이보다 더 최악은 없으리라 믿었던 그때 아들 한진우가 가족관계해체사유서를 내밀며 한소원이 본인들이 행복한 가족을 이루는 데 방해한다고 소리쳤다.
심장이 짓밟히는 듯한 고통 속에 한소원은 이혼 협의서에 서명했다.
그러면서 다시는 이 부자와 얽히지 않겠다고 굳은 결심을 내렸다.
* * *
“유연아, 이혼 협의서 좀 작성해 줘.”
한소원의 말에 전화기 너머 이유연은 깜짝 놀라 입을 떡 벌렸다.
“소원아, 민혁 씨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데, 너도 잘 알잖아. 그렇게 고생해서 여기까지 왔는데 갑자기 왜 이혼하려고 그러는 거야? 혹시 뭔가 오해가 있는 거 아니야?”
“게다가 너희가 같이 있은 지 벌써 11년이야. 진우도 벌써 일곱 살이고. 아이까지 안 보고 살 수 있겠어?”
한소원은 차 창문 밖에서 나란히 쇼핑하는 세 사람을 응시하며 비꼬듯 입꼬리를 올렸다.
“배민혁이 바람을 피웠어. 몸매가 아주 좋은 모델하고. 그것도 3년이나.”
한소원과 닮은 그 여자는 예전에 배민혁이 막아서 한소원이 하지 못했던 일을 하고 있었다.
배민혁이 그 여자를 집 바로 건너편에서 살게 한 지도 벌써 3년째였다.
하지만 한소원은 어제야 알았다.
전화기 너머로 조용한 침묵이 흘렀다. 한소원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차창 밖, 배민혁이 만나는 모델 김지연이 한진우의 손을 잡은 채 걸어가고 있었다. 두 사람의 얼굴에는 기쁜 미소가 번져 있었다. 배민혁은 내내 그들 뒤에서 흐뭇한 얼굴로 따라 걷고 있었다.
호응하듯 고개를 살짝 끄덕이다가도 물건을 사면 바로 앞으로 나와서 계산을 해줬다. 쇼핑백을 받아 경호원에게 건네는 동작을 보니 하루 이틀 해본 솜씨가 아니었다. 표정에는 본인조차 깨닫지 못한 너그러움과 다정함이 배어 있었다. 그것을 바라보는 한소원은 가슴이 바늘로 쿡쿡 찌르는 것 같았다.
뜨거운 눈물이 두 볼을 타고 줄줄 흘러내렸다. 무심코 눈물을 닦은 한소원은 울먹임이 조금 진정된 후 다시 밖에 나와 전화를 걸었다.
“보육원 새 책임자는 더 이상 뽑지 마. 다른 사람한테 맡기면 마음이 놓이지 않아, 내가 직접 할게.”
“다음 달, 그쪽으로 발령 내줘.”
말을 마친 한소원은 차 창문을 천천히 올렸다. 전화를 끊은 후 한 걸음에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도착한 뒤에도 온몸은 끊임없이 떨렸다. 집 안의 히터까지 빵빵하게 틀고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지만 추위에 몸이 여전히 덜덜 떨렸다.
의식이 점차 흐려질 무렵 배민혁이 돌아왔다.
방으로 들어온 배민혁은 이불 속으로 파고들며 한소원을 끌어안았다. 그러다가 이상한 한소원의 상태를 느꼈는지 눈살을 찌푸리며 그녀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왜 이렇게 일찍 자? 안색은 왜 이렇게 창백하고? 어디 아파?”
그러고는 한소원의 머리를 감싸 안고 이마를 맞대며 체온을 재려 했다.
두 사람에게는 너무나도 익숙한 동작이었다. 연애 4년, 결혼 7년, 한소원의 사소한 변화까지도 꿰뚫고 있는 배민혁은 아주 자연스럽게 그녀의 상태를 물었다.
그러나 이번 한 번, 아직 그 여자의 향수 냄새가 가시지 않은 배민혁의 따뜻한 몸이 다가온 순간, 한소원은 조건반사적으로 그를 피했다.
한소원의 변화를 바로 알아차린 배민혁은 온몸이 살짝 굳었다. 그러더니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괜찮아.”
한소원은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삼킨 뒤 쉰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냥 좀 피곤해서.”
배민혁은 별일 아니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뭐 좀 먹고 자. 네가 좋아하는 거 포장해 왔어.”
한소원은 배민혁을 따라 식탁으로 갔다. 배민혁이 어느새 배달 음식 용기를 하나씩 열어놓은 상태였다.
입고 있던 옷이 좀 컸던 한소원은 젓가락을 집으려고 허리를 숙이다가 실수로 배민혁이 의자 등받이에 걸어둔 코트를 떨어뜨렸다.
탁 하는 소리와 함께 코트가 바닥에 떨어지면서 콘돔 하나가 튀어나왔다.
그 순간, 분위기가 완전히 얼어붙었다.
느긋하게 행동하던 배민혁은 살짝 멈칫하더니 이내 분노가 치밀어 오른 듯 화를 냈다.
“한소원! 누가 내 물건을 만지래! 예의도 없어? 우리가 아무리 부부라고 해도 기본적인 매너도 안 지키는 거야?”
한소원은 순간 얼굴이 창백해졌다.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배민혁이 노발대발하며 바닥의 콘돔을 주워 주머니에 넣었다. 그런데 너무 급하게 움직인 탓에 팔꿈치로 옆에 있는 뜨거운 국물을 건드리면서 국물이 한소원의 손 위에 그대로 쏟아졌다.
집 안 분위기가 완전히 얼어붙었다. 조용한 방 안에는 배민혁의 거친 숨소리와 한소원의 숨 참는 소리만 남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자신이 너무 과민반응 했음을 깨달은 배민혁이 쉰 목소리로 설명했다.
“물건은 친구가 장난으로 넣은 거야. 네가 오해하고 화낼까 봐 나도 모르게 톤이 좀 올라갔어. 손은 괜찮아? 어디 봐봐.”
뜨거웠던 국물은 식어버렸지만 두 손의 화상 부위는 어느새 붉게 달아올랐다.
한 번 훑어본 배민혁은 약상자에서 연고를 꺼내, 평소 한소원이 다쳤을 때마다 해줬던 것처럼 조심스러우면서도 정성을 다해 화상 상처를 처리해 줬다.
그런데 상처를 미처 처리하기도 전에 배민혁의 휴대폰이 울렸다. 벨 소리가 특별한 것을 보니 별도로 설정해 둔 것 같았다.
재촉하듯 메시지도 여러 통 왔다.
배민혁이 살짝 멈칫한 것을 느낀 한소원은 목구멍이 씁쓸해졌다.
“확인해 봐, 혹시 중요한 일일지도 모르잖아.”
그 말에 배민혁은 안도하며 휴대폰을 꺼냈다.
휴대폰 화면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배민혁은 눈빛이 점점 어두워지더니 급하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러고는 미안함이 가득한 눈빛으로 한소원을 바라보았다.
“소원아, 네 생일 선물로 주려고 주문 제작 맡긴 게 있는데... 문제가 좀 생긴 것 같아. 오늘 밤에 가서 다시 논의해야 할 것 같아. 너한테 가장 특별하고 소중한 선물을 주고 싶었는데...”
“국물도 많이 식었고 상처도 심하지 않으니까 네가 알아서 정리해. 나도 최대한 빨리 돌아올게.”
말을 마친 뒤 연고를 바르던 면봉을 한소원의 손에 다시 쥐여주고는 몸을 돌려 자리를 떴다.
문을 나서기 전에 의자 뒤에 걸쳐뒀던 코트를 챙겨 입었다.
한소원은 떠나는 배민혁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두 손은 아직도 화끈거렸지만 수많은 바늘이 심장을 찌르는 듯한 아픔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배민혁과 11년을 함께해 온 한소원은 이 남자가 어떤 성격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어쩌면 배민혁 본인조차 모를 것이다. 거짓말을 할 때면 말하는 속도가 얼마나 빨라지는지...
게다가 조금 전 핑계는 어제도 들었던 것이었다. 역시, 사랑에 빠진 사람은 판단력이 흐려지기 마련인가 보다.
대충 상처를 정리한 뒤 딱히 식욕도 없어 한소원은 한진우가 잠들었는지 확인하러 갔다.
방문 가까이 다가가자 안에서 잔뜩 흥분한 목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지연 이모, 아빠 도착했어?”
“지연 이모, 내가 이모랑 아빠의 수호천사인 거 잊지 마. 이모와 아빠의 사랑은 내가 꼭 지켜줄게. 쓸모없는 엄마는 내쫓을 거야.”
한진우의 철없는 말에 김지연은 계속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소리가 문틈 사이로 한소원의 고막을 파고들었다. 순간 속이 울렁거리며 심장이 다시 한번 욱신거렸다.
세로쓰기 표시 중: 본문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스크롤합니다(← → 키로도 이동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