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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로 된 위장 이혼제1화

이 화는 약 3882자. 본 사이트에서는 제1~3화를 미리 읽을 수 있습니다.

결혼 3주년 기념일인 날은 심유하의 27번째 생일이기도 했다.

남편 고태준은 심유하에게 특별한 선물을 건넸다. 바로 협의이혼합의서 한 장이었다.

평온한 얼굴로 펜을 든 고태준은 서류 왼쪽 아래에 자신의 이름을 적은 뒤, 서류를 심유하 앞으로 밀어 놓았다.

“예린이 고집이 워낙 세서 좀처럼 달랠 수가 없어. 일단 이혼해야 나를 받아 줄 것 같아.”

“난 이미 사인했으니까 너도 해.”

“걱정하지 마. 그냥 형식만 갖추는 거야.”

고태준의 말투는 담담했고 그 어떤 감정의 기복도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오늘 저녁에 뭘 먹을지 이야기하는 것처럼.

* * *

심유하는 요즘 고태준이 밖에서 어떻게 지내는지 관심을 두지 않았다. 하지만 인터넷을 도배한 기사 탓에 하예린이라는 사람을 모를 수가 없었다.

고태준의 회사가 새로 계약한 신인 배우, 20살을 갓 넘긴 한창 풋풋한 여자였다.

가장 눈길을 끈 것은 고태준이 두 달 가까이 대놓고 쫓아다녔는데도 불구하고 하예린이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예전의 여자들은 한 달을 채 넘기기도 전에 고태준 쪽에서 먼저 흥미를 잃었다.

그런데 하예린만은 달랐다.

고태준의 기록을 깨뜨린 것은 물론, 위장 이혼이라는 말까지 꺼내게 만들었으니 말이다.

심유하는 이혼 서류를 받아 들고 입꼬리를 비틀었다.

“이게 나한테 준비한 선물이야? 꽤 특별하네.”

그 말에 고태준의 얼굴에 좀처럼 보기 힘든 얼떨떨한 기색이 떠올랐다.

그러다 오늘이 무슨 날인지 떠올렸는지 눈에 약간의 미안함도 스쳤다.

“요새 촬영장에서 예린이 달래느라 오늘이 결혼기념일이자 네 생일인 걸 잊었어. 미안해. 선물은 이따가 비서한테 보내라고 할게.”

‘새 사람이 생기니 난 정말로 그대로 잊혔구나.’

심유하의 입가에 비웃음이 번졌다.

“됐어. 어차피 이혼할 사이인데, 선물은 다른 사람한테 줘.”

그러자 고태준은 미간을 찌푸리면서 못마땅한 기색으로 반박했다.

“위장 이혼일 뿐이야. 서류에 사인해서 어린애 달래는 것뿐이지, 우리가 진짜 이혼하는 것도 아니잖아.”

‘과연 그럴까?’

하지만 심유하는 이미 가짜를 진짜로 만들기로, 고태준과 이혼하기로 마음을 굳힌 뒤였다.

심유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펜을 들어 한 획 한 획 자신의 이름을 적고, 3년이라는 결혼 생활에 마침표를 찍었다.

사인이 끝나자 한숨을 돌린 고태준은 이혼 서류를 사진으로 찍더니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전화 너머에서 무슨 말을 들었는지, 고태준은 눈에 띄게 기분이 좋아지면서 부드러운 목소리로 달랬다.

“나 이혼했어. 이제 떳떳하게 나랑 만날 수 있어. 촬영장에서 얌전히 기다려. 데리러 갈 테니까 우리 축하하자.”

전화를 끊은 고태준은 곧바로 몸을 일으킨 뒤 외투를 집어 들고 문밖으로 향했다.

문이 거의 닫히려는 순간에야 뭔가 떠오른 듯 심유하를 돌아보았다.

“오늘은 예린이가 나랑 사귀기로 한 첫날이라서 내가 곁에 있어 줘야 해.”

“내년에 네 생일이랑 기념일은 같이 보낼게.”

말을 마친 고태준은 기다렸다는 듯이 문을 닫고 자신의 새로운 연인에게 달려갔다.

물론 심유하가 나지막하게 건넨 대답은 전혀 듣지도 못했다.

“고태준, 우리한테 내년은 없어.”

문밖의 자동차 소리가 점점 멀어지자, 심유하는 위층으로 올라가서 금고를 열었다.

그리고 가장 안쪽에 넣어 둔 혼인관계증명서를 꺼냈다.

서류를 펼치다 보니 혼인신고를 기념하면서 찍은 사진이 보였다.

사진 속의 두 사람은 환하게 웃고 있었다.

24살의 심유하와 26살의 고태준은 바싹 붙어 있었고, 눈에는 서로를 향한 사랑과 결혼생활에 대한 기대가 가득했다.

심유하의 시선이 저도 모르게 사인이 끝난 이혼 서류로 갔다.

‘그런데 우리는 어쩌다 지금 이렇게 된 걸까?’

고태준을 처음 만난 건 어느 종방연 자리였다.

그때 심유하는 이제 막 연예계에 발을 들인 신인이었다. 복도 모퉁이에서 위를 움켜쥔 채 안색이 창백해진 고태준을 우연히 마주쳤다.

술을 많이 마셔서 속이 불편한 것이라는 걸 알아차린 심유하는 가방에 있던 요구르트 한 병을 건넸다.

그 한 번의 호의가 고태준으로 하여금 심유하에게 조금씩 관심을 두게 만들었고, 그 관심은 결국 좋아하는 마음으로 변했다.

그런데 고태준이 누구인가?

고씨 집안의 후계자이자 전형적인 재벌가 상속자, 보통 사람은 영영 닿을 수 없는 세계의 사람이었다.

심유하는 자신의 분수를 잘 알고 있었다.

이런 재벌가 도련님이 자기 같은 평범한 여자를 좋아할 리 없었다. 그저 재미 삼아 한번 놀아 보려는 거라고 생각해서 망설이지 않고 바로 거절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고태준은 포기하지 않고 오히려 늘 심유하의 곁을 맴돌았다.

고고한 대기업의 대표가 어느새 심유하의 매니저처럼 끼니때마다 직접 만든 음식을 가져다주었다.

연달아 촬영하다 심유하가 아프기라도 하면 다급하게 병원으로 데려갔다. 물속 장면을 촬영하고 나오면 언제나 가장 먼저 따뜻한 생강차를 건넸다.

심유하도 감정이 없는 로봇이 아니었기에, 날마다 쌓이는 이런 따뜻한 온기 속에서 고태준에게 조금씩 마음을 빼앗겼다.

심유하가 고태준에게 마음을 완전히 열어젖힌 것은 한 번의 와이어 액션 사고였다.

하강 도중 사고가 발생해서 심유하가 떨어지려는 순간, 고태준이 자신의 몸으로 심유하를 받아 냈다.

심유하는 다행히 멀쩡했지만, 이로 인해 고태준은 갈비뼈가 두 개나 부러졌다.

정식으로 사귀고 난 뒤, 고태준은 집안에다 이번 생에는 심유하가 아니면 결혼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집안에서 아무리 반대해도 끝까지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고태준의 발목을 잡고 싶지 않아서 심유하는 죽기 살기로 작품을 했다.

4년 동안 조금씩 올라갔고, 마침내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은 뒤에야 고씨 집안의 인정 아닌 인정을 받을 수 있었다.

두 사람이 결혼식을 올리던 날, 온 네티즌들이 두 사람의 백년해로를 빌었다.

심지어 고태준이야말로 재벌가에 드문 한결같은 사랑꾼이라고 감탄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심유하도 두 사람의 결혼이 평생 달콤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결혼 이듬해, 고태준의 셔츠에 립스틱 자국이 찍혀 있었다.

처음 발견했을 때 심유하는 걷잡을 수 없이 울었다. 늘 도도하던 고태준은 여자의 앞에 무릎을 꿇고 맹세했다.

경쟁사가 자신을 함정에 빠뜨린 것일 뿐이며, 앞으로 절대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맹세하면서.

심유하는 두 사람의 오랜 세월을 생각해서 용서를 택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부터 고태준은 점차 밤늦게 귀가하기 시작했다.

심유하는 미친 사람처럼 수도 없이 전화를 걸어 따졌고 뒤를 밟기도 했다.

그리고 고태준이 집에 돌아오면 또다시 발작하듯 싸웠다.

그럴 때마다 고태준은 그저 심유하가 감정을 쏟아 내는 모습을 지켜보고는 평온하게 타일렀다.

“유하야, 우리 업계에서 평생 한 여자만 바라보며 사는 사람은 없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너뿐이고, 고태준의 아내 자리는 너라는 것만 알면 돼. 그거면 충분하잖아.”

고태준뿐만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 모두가 심유하를 타일렀다.

바깥의 여자들은 그저 스쳐 가는 사람들이니, 고태준의 아내 자리만 잘 지키고 있으면 된다고 했다.

고태준은 결국 가정으로 돌아올 테니 그저 기다리면 된다고 했다.

그래서 심유하는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그 끝에 다다른 것이 바로 오늘, 고태준이 자신의 어린 연인을 위해 위장 이혼을 꺼내 든 것이다.

고태준이 자신의 이름을 적는 순간, 심유하의 마음을 꽉 묶고 있던 족쇄가 갑자기 풀렸다.

심유하가 고태준과 결혼한 건 고씨 집안의 돈과 권력 때문이 아니라, 오직 두 사람 사이의 순수한 사랑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 사랑은 진작에 악취를 풍기는 시궁창으로 변해 버렸다.

한때 두 사람이 더없이 소중히 여겼던 결혼마저, 고태준은 어린 연인을 달래는 데 이용되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 결혼을 더 이상 유지할 이유가 없었다.

정신을 차린 심유하는 이혼 서류를 챙겨서 가정법원으로 향했다.

협의이혼 신청을 마친 뒤, 법원에서는 숙려기간을 거치고 다시 방문하라는 안내를 받았다.

가정법원을 나서자 햇빛이 심유하의 몸 위로 쏟아졌다. 심유하는 오랜만에 홀가분함을 느꼈다.

이어서 오래전부터 저장해 둔 번호 하나를 눌렀다.

“앨런 감독님, 전에 영국에서 작품 찍자고 하셨죠? 저 그거 할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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