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물간 와이프?제1화
이 화는 약 2775자. 본 사이트에서는 제1~2화를 미리 읽을 수 있습니다.
어느 날 남편이 문득 내게 물었다. 와이어 없는 브라가 더 편하냐고 뜬금없이 물었다.
이 남자가 드디어 센스가 생겼나 보다.
하지만 다음날, 비서가 허둥지둥 달려오더니 내가 금방 받은 택배를 낚아채며 주소를 잘못 적었다고 핑계를 둘러댔다.
그리고 그날 밤, 유시아가 인스타그램에 피드를 하나 올렸다.
[남자친구가 사준 선물, 예쁘나요?]
아련한 분위기의 호텔 거울 속 셀카였는데 리본으로 장식된 정교한 속옷 선물 상자가 그녀의 손에 고스란히 놓여 있었다.
이 남자는 뒤늦게 센스가 생긴 게 아니라 단지 날 위해 성숙해지려는 의지가 없었을 뿐이었다.
나는 피드에 하트를 누르고 캡처해서 남편에게 보냈다.
[세트로 사면 20% 할인받을 수 있어. 살림살이 진짜 엉망이네.]
...
* * *
“사모님, 제가 그만 실수로 주소를 잘못 적었어요.”
은지호의 비서 정현서가 난감한 표정으로 해명하며 내 손에 쥔 택배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아직 안 열어보셨죠?”
나는 수중의 박스를 힐긋 살펴보았다. 제품명이 적혀있지 않았지만 촉감이 아주 부드러웠다. 이 브랜드 제품을 사 본 사람이라면 바로 알 수 있는 그런 촉감이었다.
결국 나는 피식 웃으며 답했다.
“네, 안 열어봤으니까 가져가세요.”
정현서는 재빨리 택배를 챙기고 내게 사과한 후 자리를 떠났다.
어젯밤에 은지호는 갑자기 내게 이런 질문을 했다.
“자기야, 여자들은 보통 와이어 없는 브라가 더 편해?”
그때까지만 해도 이 인간에 내게 선물하려는 줄 알고 그를 위해 덥힌 우유를 내려놓으며 다정한 미소를 지었었다.
“사이즈는 알아?”
나는 보통 여자들과 사이즈가 달라서 평상시에 무조건 매장에 가서 직접 골라야 한다.
그건 그렇고 결혼한 지 몇 년이 됐지만 은지호는 단 한 번도 내게 선물을 사준 적이 없다. 기념일 때마다 돈을 주면서 마음에 드는 걸 사라고 했을 뿐이다.
인간이 어쩌다 철든 모습에 나는 속옷의 브랜드와 디자인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을 늘려놨고 사이즈를 어떻게 고르는지도 알려줬다. 심지어 그의 베개 옆에 일부러 속옷을 한 벌 남겨두기까지 했다.
마침 다음날이 내 생일인지라 그의 선물만 학수고대했다.
드디어 이튿날에 택배를 하나 받았는데 택배원과 은지호의 비서가 나란히 들어온 것이다.
...
실망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나는 끝내 허무한 이 마음을 다독였다. 혹시 사이즈를 잘못 골랐을 수도 있으니, 처음 속옷 선물을 하는 남편이기에 서투를 수가 있다고 마음을 달랬다.
다만 오후가 다 돼도 은지호한테서 아무런 메시지가 없었다.
되레 생뚱맞은 소식만 얻게 되었는데...
유시아가 유방 수술로 백선 시상식에 참석할 수 없다고 한다.
백선의 여우주연상 유력 후보인 그녀가 참석하지 못한다니, 순간 이 기사가 SNS를 발칵 뒤집어놓았다.
내가 기사를 볼 때 우리 딸 가영이는 한창 휴대폰을 만지고 있었다.
곁눈질로 화면을 얼핏 봤는데 가영이가 갑자기 휴대폰을 가렸다.
그러고는 죽일 듯이 나를 노려보더니 쿠션을 홱 던지는 것이다.
“차라리 엄마가 아프지 그래!”
순간 나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이게 과연 딸아이가 엄마한테 할 소리일까?
인상 속 은가영은 착하고 얌전한 아이인데 최근 1년간 갑자기 딴사람으로 돌변하여 실로 감당할 수 없을 따름이었다.
수줍음이 많고 내성적이던 착한 아이는 입만 열면 험한 말을 내뱉는 나쁜 아이로 변했다.
이젠 나한테 악담을 날린 게 한두 번이 아니다.
기분이 잡친 나는 정색하며 따끔하게 혼내려 했는데 미처 입을 열기도 전에 아이가 소파에서 벌떡 일어섰다.
“애초에 엄마가 우리 아빠 안 꼬셨으면 시아 아줌마가 우리 엄마였을 거잖아! 뻔뻔스러워 진짜!”
은가영은 행여나 내가 못 알아들을까 봐 언성을 더 높이며 소리쳤다.
“엄마 팬들이 엄마보다 더 뻔뻔스러워. 시아 아줌마 자업자득이라고 저주하더라?! 그럼 나도 저주해야지. 엄마 당장 죽어버려. 그래야 시아 아줌마가 우리 엄마 해줄 거잖아!”
찰싹.
손바닥이 후끈거리며 짜릿한 고통이 전해졌다.
은가영은 못 믿겠다는 듯 얼굴을 막고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감히 날 때려? 감히?!”
“한 번만 더 이딴 식으로 말하면 그땐 귀싸대기로 끝나지 않을 거야!”
딸아이의 눈동자에 원망으로 가득 찼다.
“엄마 꼴 좀 봐. 진짜 어디 가서 우리 엄마라고 말하기도 쪽 팔린다고!”
아이는 곧이어 울면서 제 방으로 달려갔다.
나는 멍하니 제자리에 서 있다가 한참 뒤 주먹에 맞은 듯 가슴이 조여왔다. 숨을 깊게 들이쉬고는 굳게 닫힌 딸아이의 방 문을 바라보았다.
왜 이렇게 됐을까? 언제부터 잘못된 걸까?
나는 다시 소파에 주저앉았다.
딸아이의 휴대폰이 아직 탁자 위에 놓여 있었고 화면 속 댓글 창에 열띤 토론이 펼쳐졌다.
차마 입에 담기도 힘든 욕설과 추악한 사진들, 이건 나의 안티들로 모인 단톡방인데 이 방을 만든 장본인이 글쎄 나의 딸 은가영이었다.
가슴이 갈기갈기 찢어질 듯 아프고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몸을 기울이고 화면을 들여다보니 딸아이가 금방 단톡방에 공지를 하나 올렸다.
[오늘 바로 꽃뱀 죽인다, 고고!]
꽃뱀은 안티팬들이 내게 붙인 별명이다. 연예계를 은퇴하기 전에 나는 도화살로 가득한 눈매 때문에 유명세를 떨쳤지만 악플러들은 이런 내게 꽃뱀이라는 별명을 붙여줬다.
그해 인기가 고공행진 하면서 안티팬도 많아졌는데 이젠 은퇴한 지도 어언간 12년이 되어간다. 안티팬들이 여전히 언더그라운드에서 맹활약하고 있을 줄이야...
다만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바로 딸 가영이가 이렇게까지 나를 증오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휴대폰이 수중에서 스르륵 떨어졌다. 나는 시선을 올린 채 TV 화면에 비친 내 모습을 보게 됐는데 퉁퉁 부은 몸이 말이 아니었다. 초라한 몰골에 나는 얼른 시선을 피했다.
12년이란 시간 동안 모든 게 바뀌었다. 한때 아우라가 넘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이젠 한낱 혐오스러운 아줌마로 변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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