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안을 거슬러제3화
이 화는 약 5099자. 본 사이트에서 읽을 수 있는 3화 미리 읽기 중 마지막 화입니다. 이어지는 제4화부터는 공식 앱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옥신각신하는 사이, 유씨 노부인이 소식을 듣자마자 대전으로 달려왔다. 송씨는 재빨리 다가가 그녀를 부축해주었다.
“지영이는 다 좋은데 고집이 너무 세서 문제에요. 분명 마음속에 세자를 품고 있으면서도 자존심을 굽히지 못해 세자에게 심통을 부리고 있지 뭐예요. 내일 혼사가 정해지지 않으면 우리 유씨 집안은 온 인주의 웃음거리가 될 텐데 말이에요.”
참으로 뻔뻔하기 그지없는 인간이었다.
유씨 노부인은 불쾌한 눈으로 유지영을 바라보며 말했다.
“지영아, 세자께 사죄드리거라.”
양모가 돌아가신 뒤, 유씨 노부인은 유지영을 슬하에 두고 보살폈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무척 손녀를 총애하는 것처럼 보였겠지만, 사실 유씨 노부인은 담혜정이 남기고 간 거액의 지참금과 매년 담씨 가문에서 보내오는 풍성한 선물들 때문에 그녀를 떠맡았을 뿐이었다.
유지영이 말이 없자 유씨 노부인의 안색이 차갑게 바뀌었다.
“너는 왜 그렇게 말을 안 듣느냐? 이제는 이 할미 말도 듣지 않겠다는 거니?”
말하는 사이 유씨 노부인은 손에 든 염주를 만지작거렸다. 그러나 표독스럽게 번뜩이는 눈에서 자비로움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유지영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분명 조금 전, 배준형과 혼인하지 않겠다고 말했을 뿐인데 이들은 끝까지 강요하더니 이제는 불효의 죄명까지 씌우려는 듯했다.
“언니, 할머니 뜻대로 하세요.”
유선주는 조심스럽게 앞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언니가 허락하지 않으면 저는 평생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될 것 같아요.”
유지영은 입가에 미소를 띠고 배준형을 돌아보았다.
“세자는 저와 혼인할 마음이 없다고 하셨고, 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보아하니 선주는 세자와의 혼사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하군요. 제게 자꾸만 혼사를 강요하는 걸 보면 말이죠. 제가 보기엔 유씨 가문과 정왕부는 사주가 맞지 않아 사돈이 될 인연이 아닌가 봅니다. 그러니 세자도 더 이상 선주를 곤란하게 하지 마세요.”
그 말에 배준형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의 안색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지영아, 그게 무슨 헛소리냐?”
조급해진 송씨의 두 눈이 새빨갛게 충혈되었고, 그녀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유지영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유지영은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말을 이었다.
“세자께서는 선주와의 혼인을 원한다고 하셨는데, 정작 선주는 계속 사양하면서 자꾸만 저를 끌어들이지 않습니까. 저도 이 혼인을 원치 않으니 혼약을 없던 일로 하자는데, 제가 뭘 잘못 말했나요?”
다시 삶을 살게 된 지금, 그녀는 더 이상 참고 싶지 않았다. 가식적인 그들의 가면을 하나씩 모조리 벗겨낼 생각이었다.
“너….”
송씨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배준형은 눈살을 찌푸리며 유선주에게 물었다.
“정녕 이 혼사를 원치 않는 것이냐?”
유선주는 눈시울을 붉히며 발을 동동 굴렀다.
“언니, 저는 그저 언니를 위해 그런 건데 어찌 저에게….”
말을 마친 그녀가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자리를 뜨려는 순간, 유지영이 재빨리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세자께서는 오늘 예물까지 준비해 여기까지 오셨어. 내가 보기엔 두 사람이야말로 잘 어울리는 한쌍 같구나. 내일 내 성년례에서 어찌할지는 대비책을 마련해 두었으니 걱정할 필요 없단다.”
모두의 시선이 유지영에게 쏠렸다.
“지영이가 왜 그렇게 한사코 거절하나 했더니 이미 마음에 둔 이가 있었구나. 누구니? 내가 아는 사람이니? 너도 참, 그런 사람이 있으면 진작 나한테 말하지 그랬어.”
송씨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궁금한 얼굴로 유지영을 바라보았다.
반면 유씨 노부인은 비웃음을 머금은 채 호통쳤다.
“수치도 모르는 뻔뻔한 것! 너 때문에 집안 망신을 다 당하게 생겼구나!”
노부인은 연유도 묻지 않고 유지영을 단죄했다.
“언니, 어느 집 공자와 눈이 맞았나요?”
유선주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말만 하면 어머니께서 그 집안을 찾아가 혼약을 주선해 주실 거예요.”
송씨가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
“그래. 넌 이미 결백을 잃었으니 좀 부끄럽긴 해도 내가 나서서 혼약을 청하러 가마.”
세 사람은 가벼운 말 몇 마디로 유지영을 파렴치한 죄인으로 몰아갔다.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유지영에게 쏠렸다.
유지영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자신을 가리키며 물었다.
“숙모님께서는 할머니가 저를 잘못 가르쳐서 제가 외간사내와 눈이 맞았다는 뜻인가요?”
송씨는 음침하게 변한 유씨 노부인의 안색을 보고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듯 다급히 말했다.
“허튼소리! 내가 언제 그런 말을 했니? 네 입으로 내일 성년례 때 대비책이 있으니 그대로 진행하면 된다고 하지 않았니? 정왕 세자께서 너와의 혼인을 원치 않는 마당에 혼약을 정할 상대가 따로 있다면 분명 외간사내와….”
그녀는 끝내 사통이라는 단어를 차마 입에 담지 못했지만,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무슨 뜻인지 알아들었다.
“언니, 사람들 앞에서 언니가 직접 한 말이잖아요.”
유선주도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
유지영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되물었다.
“난 분명 내일 성년례가 정상적으로 진행될 것이고 혼약은 걱정하지 말라고 했지, 외간사내와 눈이 맞았다고 말한 적은 없는 것 같은데?”
송씨 모녀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유선주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할머니, 원래 계획이 틀어졌으니 저도 이제 마음에 없는 사람을 억지로 강요할 생각은 없어요. 유씨 가문의 신의를 지키기 위해 내일 수구(양반가 규수가 공개적으로 신랑감을 간택하는 행사에서 예비신부가 사람들을 향해 던지는 비단 공)를 던져 현장에서 정혼자를 정하겠어요.”
유지영이 말했다.
“내일 저택에 적지 않은 사람이 몰릴 테니 수구를 받길 원하는 미혼의 사내들을 모두 참석시키도록 하죠. 수구를 받은 자가 누구든, 혼약이 없고 도박 같은 악취미가 없는 사람이라면 기꺼이 그 사람에게 시집가겠어요.”
말을 마친 그녀는 송씨를 돌아보았다.
“숙모님, 이래도 제가 외간사내와 눈이 맞은 건가요?”
송씨는 흠칫하더니 어색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당연히 아니지.”
그 말에 유씨 노부인이 큰소리로 호통쳤다.
“무모한 짓을 하려는구나! 유씨 집안의 적장녀가 수구로 신랑감을 고르겠다니! 사람들이 우릴 어떻게 생각하겠느냐! 유씨 집안 딸들은 아무도 원하지 않는다고 여길 것 아니냐!”
유지영은 입술을 깨물었다.
궁지에 몰리지 않았다면 누가 이런 선택을 하겠는가?
“지영아, 사실 내게 혼약이 없는 친정 조카가 한 명 있단다. 너와 나이도 비슷한데 네가 원한다면 숙모님이 주선해 주마. 송씨 가문으로 시집가면, 장차 내 얼굴을 봐서라도 그 집에서 너를 홀대하진 않을 것이다.”
송씨는 매우 신중한 어투로, 마치 다 너를 위한 일이라는 듯 말했다.
송씨가 말한 그 조카에 대해 유지영도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어릴 적 낙마한 탓에 절름발이가 되었는데, 적출이라는 명분을 등에 업고 죄 없는 시녀들을 괴롭혀 죽인 못된 인물이었다. 열여덟 살에 술에 취해 귀족가 규수를 희롱했다가 상대 집안에서 몽둥이로 그의 다리를 부러뜨렸을 때도, 송씨 집안에서는 감히 입도 벙긋하지 못했다.
그런 쓰레기를 감히 추천하다니!
“어머니, 지영이는 고집이 세서 너무 높은 집안에 시집가는 것이 오히려 독이 될 수 있습니다. 반면 선주는 태어날 때부터 복덩이로 불렸으니, 정왕부로 시집가면 장차 분명히 세자의 앞길에 도움이 될 거예요.”
송씨는 웃으며 유씨 노부인을 재촉했다.
“차라리 그럴 바에야 겹경사로 치고 내일 둘이 동시에 혼약을 맺는 게 어떠신가요?”
유씨 노부인은 염주를 만지작거리며 유지영을 훑어보다가 담담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네 숙모님도 다 널 위해 한 말인데, 넌 어떻게 생각하느냐?”
“제 혼사를 참 급하게 정한다는 느낌은 있지만, 작은어머님의 제안에 저는 달리 할 말이 없습니다. 허나 저와 정왕부의 혼약은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일이고, 이 일 역시 담씨 가문에서 주선한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약혼녀가 선주로 바뀌었으니, 그쪽에서 불쾌하게 생각해 숙모님이 욕심에 혼약을 바꾸었다고 여긴다면 유씨 가문의 명성과 작은아버지의 승진에 영향이 가지 않겠어요?”
유지영은 유씨 노부인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노부인은 꿈에도 경성으로 돌아갈 날만 그리고 있었다.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경성의 생활을 경험한 욕심 많은 늙은이가 어찌 인주의 삶에 만족하겠는가?
마침 담 대인은 이부상서로, 관원들의 승진을 관장하고 있었다. 만약 그가 훼방을 놓는다면 유씨 가문이 경성으로 돌아가는 길은 더욱 어려워질 수도 있었다.
역시나 노부인은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럼 수구를 던졌는데 송가의 아들이 받는다면 어떡할 거냐?”
송씨가 포기하지 않고 재차 물었다.
“그럼 그것도 인연이니까 아무도 뭐라 하지 못하겠죠. 사람들이 선주와 정왕 세자의 사이를 의심하지도 않을 테고요.”
그 말을 들은 송씨는 노부인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어머니, 사실 지영이 말도 일리가 있네요. 유씨 가문의 명성을 위해서라도 지영이가 하자는 대로 해요.”
유선주도 다급히 거들었다.
“할머니, 언니가 하자는 대로 해요.”
노부인은 두 사람이 졸라대자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는 척하며 말했다.
“그럼 누가 되든 후회하지 말거라!”
“걱정하지 마세요, 할머니. 그럴 일은 없어요.”
유지영은 단호한 얼굴로 답했다.
유씨 노부인은 한심한 눈으로 유지영을 바라보더니 사람을 시켜 무대를 만들게 하고, 내일 가문의 장녀가 수구로 정혼자를 택한다는 사실을 공표하게 했다.
곧이어 유씨 노부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배준형과 유선주는 사주단자를 교환했다. 유선주와 혼인하기 위해 배준형은 중매 어멈까지 데리고 왔다.
유지영은 그들이 뭘 하든 관심이 없었기에 조용히 자리를 떠 종령원으로 돌아왔다.
정원에 들어서니 조용히 마당을 쓸고 있는 홍주가 보였다. 전생에도 그녀에게 충성하던 아이였는데, 실족사로 죽었었다.
“홍주야!”
유지영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홍주를 불렀다.
홍주는 제 귀를 의심하며 쭈뼛쭈뼛 다가왔다.
“아가씨, 소인을 부르셨나요?”
“외출할 테니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오거라.”
홍주는 놀란 눈으로 유지영을 바라보았다.
“아가씨, 소인은 그저 허드렛일이나 하는 삼등 시녀일 뿐인데, 어찌 저를 데리고 외출하신단 말씀이신가요?”
주향이 입을 삐죽이며 경멸 섞인 어투로 말하자, 유지영이 싸늘한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내가 누굴 데리고 나가든 시녀인 네가 상관할 바는 아닌 것 같은데?”
주향은 당황하더니 싸늘한 얼굴의 유지영을 보고 다급히 사죄했다.
“소, 소인은 그런 뜻이 아니오라….”
“꿇어라! 내가 돌아오기 전까지 일어나지 말고 반성하고 있거라!”
유지영의 명령에 주향은 잔뜩 불만스러운 얼굴로 정원에 무릎을 꿇었다. 유지영과 홍주가 정원을 나서자, 그녀는 바닥에 침을 뱉으며 중얼거렸다.
“저러니 정왕 세자께도 버림을 받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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