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시 피안을 거슬러 · 제2화설정≡

피안을 거슬러제2화

이 화는 약 4782자. 본 사이트에서는 제1~3화를 미리 읽을 수 있습니다.

종령각 이층 누각.

유지영은 부스스 눈을 뜨고 사방을 둘러보았는데, 이곳의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까지 유난히도 익숙하게 느껴졌다.

회랑 아래에서는 하인들이 정원을 단장하며 내일 있을 성년례가 떠들썩할 거라며 수근거리고 있었다.

그녀는 손톱으로 손바닥을 꾹 눌렀다. 아픔이 몰려왔고, 곧바로 이 모든 게 꿈이 아님을 직감했다.

그녀는 죽임을 당한 뒤 성년례 하루 전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이때 밖에서 고씨 어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가씨, 부인께서 대전으로 들라 하십니다. 경성에서 사람이 온 듯합니다.”

전생의 배준형도 성년례 하루 전에 인주에 도착해 그녀에게 혼약을 청했다고 했다.

그녀는 얼른 일어나 대전으로 향했고, 정원에 들어서니 비단옷을 입은 호위들이 허리에 검을 차고 대기하고 있었다.

“세자, 선주와 혼인하고 싶으시다고요?”

“그건 안 됩니다. 세자는 원래 지영이와 정혼하려 하지 않았습니까.”

놀란 목소리가 대전 안에서 울려 퍼지자 유지영은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부인, 지영이는 제게 그저 여동생 같은 사람이고, 선주야말로 제가 진정으로 연모하는 이입니다. 만약 이런 감정을 가지고 지영이와 혼인한다면 참으로 무책임한 일이지요.”

목소리를 들으니 전생에 그녀와 한 이불을 덮고 살았던 배준형이 분명했다.

“이번 생에 저는 선주 한 사람만 사랑할 것이고, 이 마음은 절대 변치 않을 것입니다. 하물며 정왕부가 유씨 집안과 혼약이 있었다고는 하나 정확히 누구와 혼인할 것인지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거늘, 어찌 선주는 안 된다고 하십니까?”

비단 두루마기를 입은 배준형은 대전에 우뚝 서서 우아한 기품을 뽐내고 있었다. 준수한 외모에 온화한 성격까지, 그는 경성의 뭇 여인들이 꿈에도 그리는 신랑감이었다.

한때는 유지영도 그런 그를 마음에 품었던 적이 있었다.

몇 년 전, 배준형은 유씨 저택에서 일 년 정도 지낸 적이 있었다. 나중에 정왕부로 돌아간 후에도 서신을 주고받으며 매년 명절 때는 그녀에게 선물을 보내곤 했었다.

그렇게 양가는 유지영의 성년식이 마치자마자 바로 혼약을 정하기로 약속했다.

그런데 지금 배준형이 갑자기 마음을 바꾸어 유선주와 혼인하겠다고 선언한 것이었다.

유지영은 그 순간 배준형도 회귀했음을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과거 그녀는 그의 나약함과 가식적인 면모를 뼈저리게 증오했었다. 한때 절절했던 사랑도 결국 그가 권세를 얻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았으니 말이다.

또 한 번의 기회가 생긴 지금, 그녀는 저 가식적인 가면을 벗기고 그의 날개를 꺾어 지옥으로 떨어뜨리리라 다짐했다.

아주 오래전부터 유지영은 자신의 출생의 비밀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유씨 집안의 적장녀가 아니었다. 그녀의 생모는 궁중에 계신 서 태후였다.

과거 서 태후는 입궁하기 전 혼인을 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국모의 운명을 타고났다는 점술가의 말이 궁중에 계신 선제에게 전해져 강제로 입궁해 황후가 되었다. 그때 태후는 뱃속에 유지영을 품고 있었다.

서 태후가 선제와 어떤 협상을 이뤄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선제는 서 태후가 아이를 낳는 것에 동의했다. 단지 아이의 출생을 외부에 알리지 않고 비밀리에 한때 친우이자 유씨 집안의 맏며느리였던 담혜정에게 딸을 맡기게 되었다.

안타깝게도 건강이 좋지 않았던 담혜정은 유지영이 여섯 살 나던 해에 지병으로 죽고 말았다. 그 뒤로 유지영은 유씨 노부인의 슬하에서 컸다.

그동안 유씨 집안이 인주에 거주했던 이유는 태후가 유지영의 출생의 비밀이 알려질 것을 걱정했기 때문이었다.

전생의 황제에게는 자식이 없었기에 친왕의 자손들 중에서 자질이 높은 자를 골라 태자에 책봉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배준형은 태후의 간택을 받았다.

그가 잘나서가 아니라 단지 유지영의 부군이기 때문이었다.

물론 배준형은 이 진실을 알지 못한 상태였다.

짝, 짝!

유지영은 손뼉을 치며 문지방을 넘어 안으로 들어섰다.

“지영이?”

집안의 둘째 며느리인 송씨는 눈시울을 붉히며 유지영을 바라보더니 다가와 난감한 얼굴로 그녀의 손을 잡았다.

사람들 앞에서 송씨는 친딸인 유선주보다 유지영을 더 아끼는 것처럼 연기하며 인자하고 선하다는 명성을 쌓았다.

송씨는 외출할 때마다 유지영과 유선주를 꼭 데리고 다녔는데, 동갑인 두 자매는 사이가 좋기로 소문이 났다.

겉으로는 딸인 유선주와 유지영을 제 자식처럼 아끼며 전혀 홀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는 세가의 서녀 출신인 송씨가 유지영의 명성을 더럽히기 위한 수단에 그치지 않았다. 전생에 유지영은 온갖 오명을 뒤집어썼음에도 불구하고, 아무에게도 보살핌을 받지 못했다.

“숙모님.”

유지영은 담담히 손을 빼고는 배준형을 돌아보며 말했다.

“조금 전에 세자께서 하신 말씀은 다 들었습니다. 세자께서 선주를 연모하시어 혼인하고 싶다 하셨는데, 숙모님은 어찌하여 굳이 저를 엮는 건가요?”

배준형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나와 선주는 서로 연모하는 사이다. 지영이 너는 언니로서 동생을 축복할 줄도 알아야지, 괜한 시기심에 선주를 원망하지 말거라.”

전생에 그는 다른 여인에게 조금만 다정하게 굴어도 시샘하고 불만을 퍼붓는 유지영을 보곤 했다.

처음에는 어린 마음에 신선하고 귀엽다고 느꼈고, 유지영의 화려한 외모 또한 마음에 들었기에 신혼 초에는 아무런 불만이 없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자 유지영에게 좀처럼 아이가 들어서지 않았고, 정왕부는 황위 경쟁 한복판에 있었기에 첩을 들이지 못하게 하는 그녀에게 불만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다른 세자들은 모두 자식을 보았는데 홀로 후사를 보지 못하여 경성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속도 모르고 허구한 날 애정을 갈구했고, 배준형의 마음도 점차 멀어져갔다.

그리고 훗날 유지영이 더럽혀진 몸으로 돌아왔을 때는 역겨운 마음밖에 들지 않았다.

그 당시 그는 그녀가 빨리 죽어주기만을 바랐다.

이기적이고 막무가내인 유지영보다는 착하고 대범한 유선주가 좋았다. 유선주는 유지영처럼 그를 아래에 두고 자존심을 짓밟지 않고, 늘 공경하는 시선으로 우러러보았다. 게다가 유선주는 어릴 때부터 복덩이라는 별명도 있었으니, 경성의 모든 사내가 욕심내는 신부감이었다.

결국 그는 그런 유선주와 혼인해 온 경성의 부러움을 샀다. 지금 생각해도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지어질 만큼, 배준형은 한시라도 빨리 유선주와의 혼사를 정하고 싶었다.

“지영아, 홧김에 그런 말 하는 거 아니야. 유씨 집안의 적장녀는 너이지 않니. 너도 세자와의 혼인만 손꼽아 기다리는 걸 온 집안이 아는데 선주가 어찌 네 사람을 가로채겠어.”

송씨가 다 이해한다는 듯이 말했다.

그 순간 배준형의 표정이 눈에 띄게 일그러진 것이 보였다.

대전 안의 시녀들마저 비웃음을 머금었다.

“가서 둘째 아가씨를 모셔오너라!”

송씨가 앙칼진 목소리로 명했다.

“감히 언니의 정혼자를 탐내다니! 내 이것을 그냥!”

송씨는 속으로는 기뻐하면서도, 겉으로는 성이 난 척 유지영의 자존심을 짓밟고, 모두에게 그녀가 수치심도 모르고 제 것이 아닌 사람을 탐낸다고 전했다.

“숙모님!”

유지영은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제가 언제 정왕 세자와의 혼인을 손꼽아 바란다고 말한 적 있나요? 조금 전에 이미 명확히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세자께서 선주를 연모하여 혼인하고 싶으시다는데 그게 저와 대체 무슨 상관이죠?”

“지영아, 홧김에라도 그런 말은 하면 안 되지.”

송씨의 말에 유지영도 차가운 비웃음으로 응수했다.

“제 거절이 숙모님께는 홧김에 한 말로 들렸나 보군요. 숙모님은 절 수치도 모르는 파렴치한 사람으로 만들 속셈인가요?”

송씨가 흠칫하더니 당황한 눈으로 유지영에게 소리쳤다.

“지영아, 어찌 웃어른에게 예의 없이 그런 식으로 말하느냐!”

배준형이 눈살을 찌푸리더니 훈계하듯 말했다.

송씨가 손사래를 쳤다.

“아니, 괜찮습니다. 세자께서 갑자기 혼약을 바꾸고 싶다 하시니, 지영이가 많이 당황했나 봅니다.”

이때 유선주가 시녀의 부축을 받으며 안으로 들어섰다. 하늘거리는 흰 비단치마를 입은 청순한 얼굴의 단아한 미인이었다.

유지영의 공격적인 말투와는 달리, 유선주는 대범하게 예를 행했다.

“세자와 어머니를 뵙습니다.”

“마침 잘 왔다. 어서 너는 세자와 혼인할 마음이 없다고, 이 혼사는 원래부터 지영이의 것이었다고 말하거라.”

송씨는 일부러 언성을 높이며 근엄한 척 말했다.

유선주는 눈시울을 확 붉히더니 애처롭게 유지영과 배준형을 번갈아 보았다.

“어서 말하라는데도! 절대 지영이의 세자비 자리를 빼앗지 않겠다고!”

송씨가 계속 재촉했다.

배준형은 혐오스럽다는 듯이 유지영을 향해 눈을 부릅떴다.

“네가 무슨 짓을 벌이더라도 난 절대 너와 혼인하지 않을 것이다. 내 마음엔 오로지 선주뿐이야.”

그러고는 눈물을 흘리고 있는 유선주에게 다가가 다정하게 말했다.

“너무 자책하지 말거라. 내가 꼭 너여야만 한다고 한 거니까.”

유선주는 놀란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안 됩니다. 장녀는 지영 언니이니 저는 언니의 정혼자를 빼앗을 수 없어요. 게다가 내일이 바로 언니의 성년례이고, 집안에서는 이미 대외적으로 언니가 내일 혼약을 정할 거라고 선포하였는데 어찌 저 때문에 가문의 체면에 먹칠할 수 있겠어요. 세자 오라버니의 마음은 감사하지만, 저는 받을 수 없어요.”

사람들이 아는 유선주는 온순하고 욕심이 없는 착한 처자였다.

그리고 유지영은 그녀와 반대로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다.

유지영은 배준형의 입에서 더 듣기 싫은 말이 나오기 전에 유선주의 말을 가로챘다.

“세상에 사내가 정왕 세자 한 명뿐인 것도 아닌데, 네가 좋으면 가지면 되지 왜 굳이 내게 죄명을 뒤집어씌우려는 거니?”

유선주는 고개를 들더니 어리둥절한 눈으로 유지영을 보았다.

“언니?”

“선주야!”

배준형이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더니 싸늘한 눈으로 유지영을 바라보며 말했다.

“지영도 허락하였으니 너는 그저 정왕부의 혼약을 받아들이면 된다. 아마 내일 성년례에서 지영이가 대비책을 마련해 두었겠지.”

유선주는 불안한 눈으로 송씨를 바라보았다.

송씨 역시 의심의 눈초리로 유지영을 바라보고 있었다.

‘왜 갑자기 성격이 바뀌었지?’

세로쓰기 표시 중: 본문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스크롤합니다(← → 키로도 이동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