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결합은 잘못된 선택이었다제1화
이 화는 약 3754자. 본 사이트에서는 제1~3화를 미리 읽을 수 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란 남편 고윤재와 재결합한 지 3년째 되던 해, 이수연은 별생각 없이 참석한 동문 모임에서 남편의 충격적인 비밀을 알게 됐다.
그 비밀을 털어놓은 사람은 학창 시절 퀸카로 유명했던 정지안이었다.
누군가 살면서 가장 짜릿했던 일이 뭐냐고 묻자, 술기운이 오른 정지안은 손에 든 잔을 가볍게 흔들며 도발하듯 입을 열었다.
“음... 윤재 선배의 숨겨진 애인으로 지내온 거? 더 짜릿한 건 선배 와이프는 우리가 헤어진 줄 철석같이 믿고 있다는 거야.”
정지안은 거리낌없이 말을 이어 갔다.
“사실 우리 사이엔 아이도 있어. 난 지금도 선배가 사 준 한정판 슈퍼카를 몰고, 선배가 주는 생활비로 살고 있어. 선배가 마련해 준 별장에는 도우미들까지 따로 있고...”
폭탄이나 다름없는 고백이었다.
순식간에 모든 사람의 시선이 이수연에게 쏠렸다.
이수연이 바로 고윤재의 아내였으니까.
사람들은 이수연이 충격에 빠져 울음을 터뜨리거나 당장 정지안에게 따져 묻기를 기대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이수연은 울지도, 화를 내지도 않았다. 그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연히 자리를 지켰다.
마침 웨이터가 빈 잔에 술을 따라 주자, 이수연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요.”
* * *
동문 모임이 끝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주변 사람들은 하나둘 이수연의 변화를 알아차리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달라진 건 SNS였다.
이수연은 고윤재와 함께 찍은 사진부터 그동안 올렸던 게시물까지, 고윤재와 관련된 흔적을 하나도 남김없이 지웠다.
고윤재가 늦게 귀가하는 날이면 늘 불을 켜 둔 채 기다리던 습관도 며칠 만에 사라졌다.
그러더니 얼마 뒤에는 그토록 오랫동안 매달려 왔던 시험관 시술마저 중단했다.
이수연이 아이를 갖기 위해 얼마나 애써 왔는지는 주변 사람들도 모두 알고 있었다.
5년 전, 이수연은 고윤재와 함께 교통사고를 당했다.
차량이 충돌하는 순간, 이수연은 본능적으로 고윤재를 감싸안고 모든 충격을 받아 냈다.
덕분에 고윤재는 거의 다치지 않았지만, 이수연은 크게 다쳐 사흘 밤낮을 의식 없이 병원에 누워 있어야 했다.
겨우 의식을 되찾은 뒤에는 앞으로 임신이 어려울 수도 있다는 의사의 소견을 받아들여야 했다.
그럼에도 이수연은 대를 이어야 한다는 고씨 가문 어르신들의 바람을 외면하지 못했다.
고씨 가문에 아이를 안겨 주겠다는 마음 하나로 매달 병원을 찾았고, 두꺼운 주삿바늘을 견디며 하루하루 아이가 생기기만을 바랐다.
그렇게까지 간절했던 아이였지만 이제는 그것마저 미련 없이 놓아 버렸다.
시험관 시술을 중단한 뒤로는 고씨 가문의 크고 작은 일에서도 하나둘 손을 뗐다.
본가를 찾아 집안 어른들의 안부를 챙기는 일도 그만뒀고, 고윤재가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에도 더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마치 고씨 가문 사모님이라는 자리를 스스로 내려놓기라도 한 사람처럼 일에만 몰두했다.
매일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가 밤늦게야 돌아오는 날이 이어졌다.
그런 변화가 하나둘 쌓이고 나서야 고윤재도 마침내 무언가 이상하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날도 하던 일을 모두 마친 고윤재는 이수연의 작업실을 찾아갔다.
말끔하게 정장을 차려입은 고윤재에게서는 성공한 사업가 특유의 여유와 사람을 압도하는 분위기가 묻어났다.
“수연아...”
문 앞에 선 고윤재가 다정하게 이수연을 불렀다.
책상 앞에 앉아 있던 이수연의 손이 잠시 멈췄다. 하지만 돌아보지는 않았다.
“무슨 일이야?”
나직하고 차분한 목소리였다.
예전 같았으면 고윤재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몸을 돌려 반갑게 맞았을 것이다.
재킷을 벗겨 주고 차갑게 식은 두 손을 감싸 쥔 채 입김까지 불어 가며 따뜻하게 녹여 줬을 터였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이수연은 고윤재를 돌아보지도 않았다.
그 사소한 차이가 고윤재에게는 이상하리만큼 크게 느껴졌다.
고윤재는 문 앞에 선 채 이수연의 표정을 살피려 했다. 하지만 이수연이 살짝 고개를 돌리는 바람에 길게 늘어진 머리카락에 얼굴이 가려져 제대로 확인할 수 없었다.
“먼저 들어가. 아직 한참 더 해야 해.”
말투는 평소와 다를 것 없이 차분했다.
그런데도 고윤재는 알 수 없는 불안감에 마음 한구석이 먹먹해졌다.
며칠 전 동문 모임이 있던 날, 고윤재는 다른 일정 때문에 참석하지 못했다.
정지안이 그 자리에서 무슨 말을 했는지도 나중에야 전해 들었다.
고윤재는 이수연이 갑자기 달라진 이유가 혹시 그날 일 때문인가 싶었다.
‘그렇다면 지안이가 술에 취해 아무 말이나 한 것뿐이라고 설명하면 돼.’
고윤재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먼저 입을 열었다.
“수연아, 그날 일은 전해 들었어. 지안이가 술에 취해서 헛소리한 거야. 나랑 지안이는 이제 아무 사이도 아니야. 그냥 어려운 처지에 있는 동창을 도와주고 있었을 뿐이야. 지안이가 가진 돈이 하나도 없으니까...”
“맞아. 우리는 동문이잖아. 게다가 당신은 이제 성공한 기업가니까 평판을 생각해서라도 주변 사람들을 두루 챙길 필요가 있지. 나라도 당신처럼 도와줬을 거야.”
이수연은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었다.
“정지안 SNS를 보니까 오늘 생일이던데. 생일 축하하러 안 가?”
예상보다 지나치게 담담한 반응에 고윤재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수연아, 나한테 화나서 이러는 거야? 오늘 너랑 같이 집에 가려고 일부러 여기까지 온 거야.”
하지만 이수연은 여전히 책상 앞에 앉아 작업에 몰두하고 있었다.
“생일은 일 년에 한 번뿐이잖아. 안 갔다가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다녀와.”
고윤재의 목소리에 조금씩 짜증이 묻어났다.
“나는 며칠째 너랑 집에서 밥 한 끼 제대로 먹지도 못했고, 얘기도 제대로 못 했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고윤재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정지안에게서 걸려 온 전화였다.
전화를 받자, 수화기 너머로 울먹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빠, 나 실수로 생일 케이크를 떨어뜨렸어. 올 때 케이크 하나만 사다 주면 안 돼? 케이크가 없으면 생일이 너무 허전할 것 같아...”
고윤재는 귀찮다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면서도 어느새 몸을 돌려 문 쪽으로 향했다.
문 앞까지 간 고윤재는 문득 걸음을 멈췄다.
유리문 너머로 보이는 이수연은 여전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작업을 이어 가고 있었다. 손끝에는 조금의 망설임도, 흐트러짐도 없어 보였다.
고윤재는 그런 이수연을 잠시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수연아, 집에 가서 좀 기다려. 꿀물도 한 잔 준비해 주고. 애들이 오늘 같은 날 그냥 보내 줄 리 없으니까. 분명 술을 잔뜩 먹일 거야. 알았지?”
잠시 뜸을 들이던 고윤재가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덧붙였다.
“아, 그리고 얼마 전에 경매에서 삼신할머니를 본떠 만든 옥패를 하나 낙찰받았어. 좋은 기운을 가져다준다고 하더라. 우리한테도 분명 예쁜 아이가 찾아올 거야.”
이수연이 대답하기도 전에 고윤재는 문을 닫고 떠났다.
문이 닫히자, 작업실 안은 다시 고요해졌다.
한쪽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던 이수연의 조수는 결국 참지 못하고 눈시울을 붉혔다.
“고 대표님이 어떻게 저럴 수 있어요? 언니가 예전에 고 대표님 구하려다가 이렇게 된 걸 뻔히 알면서... 다른 여자 생일 챙기러 가면서 어떻게 언니한테 아이 이야기를 해요?”
“괜찮아.”
이수연은 나직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그 말과 달리, 눈앞의 스케치 용지는 이미 눈물 자국으로 얼룩져 있었다.
몇 번이고 떨어진 눈물에 애써 그려 놓은 선마저 번져 엉망으로 뭉개져 있었다.
그런데도 이수연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휴대폰을 들었다.
작성해 두었던 이메일의 마지막 문장을 마저 입력하고 전송 버튼을 눌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답장이 도착했다.
[제 해외 디자인 스튜디오에 합류해 주신다니 정말 환영해요. 오래 기다렸어요.]
메시지를 확인한 순간, 그제야 이수연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이제 7일만 버티면 됐다.
7일 뒤면 이수연은 이곳을 완전히 떠나 고윤재도, 정지안도, 두 사람과 얽힌 지난 시간도 모두 뒤로한 채 새로운 삶을 시작할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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