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리콘 케이지제1화
이 화는 약 2555자. 본 사이트에서는 제1~3화를 미리 읽을 수 있습니다.
한밤중, 아주 미세한 기척이 나를 잠의 나락에서 강제로 끌어올렸다.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보인 것은 남편 진우의 뒷모습이었다. 그는 얼마 전 업무 스트레스를 해소하겠다며 사 온 실물 크기의 리얼돌을 품에 안고 있었다. 인형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지독하리만치 전유적이었고, 그 집착의 깊이는 어딘가 비정상적이었다.
그 순간이었다. 내 머릿속에 기괴한 글자들이 마치 인터넷 방송의 실시간 채팅창처럼 스쳐 지나갔다.
[여주가 또 공감 시스템을 썼네. 자기 의식을 인형 몸속으로 옮겨서 조연 눈앞에서 남주랑 애정 행각이라니, 진짜 짜릿하다!]
[이 남주 여주 커플, 노는 수준 좀 봐. 저 조연 여자는 아마 지금까지도 꿈에도 모르겠지? 하하하!]
나는 시선을 옮겨 소파 위에 놓인 인형을 보았다. 인형의 입꼬리가 기괴한 각도로 비틀리며 비죽, 올라가 있었다.
그 광경을 보고 있자니 참을 수 없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래, 네가 그렇게 인형 놀이에 진심이라면 내가 기꺼이 도와줄게. 평생 그 인형 속에 갇혀서 '충직한' 인형으로 살게 해줄게.
…
* * *
남편 진우에게 이상한 취미가 생긴 건 약 석 달 전이었다.
어느 날 그가 집으로 커다란 실리콘 인형을 들고 왔다.
성인 여성 크기에 밤색 웨이브 헤어, 도톰한 입술, 그리고 묘하게 사람을 홀리는 눈매를 가진 인형이었다. 그는 회사 워크숍 경품으로 받은 거라고, 스트레스 해소용이라며 변명했다.
“요즘 다들 이런 거 하나씩 두고 산대. 안고 자면 심리적으로 안정된다나 뭐라나.”
나는 소파에 앉아 휴대폰을 보던 중 고개를 들어 그 인형을 무심히 쳐다봤다.
만듦새는 지독할 정도로 정교했다. 피부를 만지면 체온이 느껴질 것 같은 촉감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그 입꼬리에 걸린 미묘한 미소만큼은 보면 볼수록 불쾌했다.
“마음대로 해. 침대 위에만 올리지 마.”
내 말에 진우는 싱글벙글 웃으며 인형을 거실 1인용 소파에 앉히고는 정성스럽게 담요까지 덮어주었다.
그날 이후, 그 인형은 늘 그 자리에 있었다.
아침에 나갈 때도, 저녁에 돌아올 때도.
하지만 위치는 교묘하게 변했다.
어떤 날은 소파에 비스듬히 누워 있었고, 어떤 날은 베란다 안락의자에 기대어 있었다. 한밤중에 물을 마시러 나왔다가 침실 문 앞에 서 있는 인형의 실루엣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란 적도 두어 번 있었다.
진우에게 인형을 옮겼느냐고 물었지만, 그는 늘 시치미를 뗐다. 오히려 집에 귀신이라도 있는 것 아니냐며 농담조로 웃어넘길 뿐이었다.
나는 더 이상 따지지 않았다.
지난주 금요일 전까지는.
그날 나는 밤 11시까지 야근을 하고 귀가했다. 진우는 이미 잠든 상태였다.
조심스럽게 씻고 침대에 누워 막 잠이 들려던 찰나, 귓가에 가느다란 소리가 들려왔다.
거친 숨소리 같기도 하고, 무언가를 억누르는 신음 같기도 했다.
나는 눈을 떴다. 커튼 사이로 스며드는 가로등 불빛에 의지해 바라본 진우는 나를 등진 채 몸을 미세하게 떨고 있었다. 혼자 욕구를 해소하는 중이라 생각하니 역겨움이 치밀어 몸을 돌려 눈을 감으려 했다.
하지만 소리가 이상했다.
혼자의 호흡이 아니었다.
두 사람의 호흡이었다. 극도로 가늘고 떨리는, 목구멍 깊은 곳에서 쥐어짜는 듯한 소리.
나는 거칠게 몸을 돌려 확인했다.
진우는 그 인형을 품에 꼭 안고 있었다.
그는 인형의 얼굴을 제 가슴팍에 파묻고 한 손으로는 인형의 뒷머리를 감싸 쥔 채, 다른 한 손으로는 인형의 몸을 거칠게 훑고 있었다.
그때였다. 인형의 입이 살짝 벌어지더니, 극도의 쾌락에 젖은 듯한 숨소리가 흘러나왔다.
내 피가 순식간에 차갑게 식어버렸다.
바로 그 순간, 머릿속에서 기계적인 알림음이 터졌다.
당황할 틈도 없이 눈앞으로 글자들이 미친 듯이 굴러가기 시작했다.
[왔다 왔다! 여주 누나, 오늘 밤도 남편한테 제대로 사랑받네~]
[옆에 조연이 누워 있는데 진짜 짜릿하다. 진우는 이런 스릴을 즐긴다니까.]
[유나는 지금 인형 몸속에서 날아갈 것 같겠지? 원룸에 있는 자기 진짜 몸은 아마 덜덜 떨고 있을걸? ㅋㅋㅋ]
[조연 저 바보 같은 표정 좀 봐. 남편이 그냥 변태인 줄로만 아네. 웃겨 죽겠다.]
[우리 여주 연기력 대박. 낮에는 청순한 신입사원, 밤에는 요염한 인형. 조연을 아주 원숭이 취급하네.]
[진우도 대단하다. 와이프 면전에서 상간녀랑 즐기다니. 저 멘탈 인정.]
나는 그 자리에 돌처럼 굳어버렸다.
무슨 뜻이지?
‘여주’는 누구고, 유나는 또 누구야?
문득 이름 하나가 스쳤다.
진우의 회사 신입 인턴, 이유나.
얼마 전 집에 두어 번 놀러 왔던 여자애였다.
마르고 왜소한 체구에 조용조용 말하던, 겉보기엔 참 순해 보이던 아이.
그 애가 이 인형이랑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글자들은 멈추지 않았다.
[조연은 아직도 상황 파악 중. 불쌍해라. 남편이랑 상간녀가 자기 얼굴 앞에서 대놓고 노는데도 몰라.]
[유나 내일 또 이 집으로 밥 먹으러 온다는데? 그때 진우 티셔츠 입고 와서 조연 자극할 거래. 대박.]
[조연 성격에 절대 못 참을 텐데. 싸워라! 싸워라!]
[에이, 조연 완전 겁쟁이잖아. 저번에 유나가 남편 무릎에 앉았을 때도 아무 말 못 하던데 뭘.]
나는 이불 끝을 꽉 움켜쥐었다. 그리고 아무것도 모르는 척 몸을 뒤척여 천장을 바라보았다.
곁눈질로 진우의 품에 안긴 인형을 훑었다.
어둠 속에서, 인형의 입꼬리가 아주 미세하게 올라가 있었다.
그것은 분명한 비웃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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