빼앗긴 이름의 주인제1화
이 화는 약 2744자. 본 사이트에서는 제1~3화를 미리 읽을 수 있습니다.
내 남편 정우진은 원양 화물선 선장이었고 1년 12개월 중 10개월을 바다에서 보냈다.
나는 늘 정우진을 믿었다. 다만 나에게는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작은 습관 하나가 있었다.
정우진의 배가 항구에 들어와 보급을 받을 때마다 나는 일등항해사의 아내인 서지은을 불러 함께 술을 마셨다. 서지은의 남편은 말수가 적은 편이었지만 서지은은 정반대였다. 서지은은 말도 많았고 술도 약했다.
우리는 집안 이야기부터 배에서 있었던 일까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그러다가 세 번째 잔이 들어갔을 때, 서지은이 불쑥 내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말했다.
“언니 남편은 진짜 로맨틱하더라고요. 지난달에 배가 마르세유에 들어갔을 때 현지 장인한테 일부러 물결 모양 다이아몬드 세트를 맞췄대요. 목걸이에 팔찌, 귀걸이까지 한 세트로 다 하고 보급선 편에 따로 보내기까지 했다던데요? 저 진짜 부러워 죽는 줄 알았어요.”
그러자 내가 낮게 대답했다.
“그래? 난 받은 적이 없는데?”
하지만 나는 더 묻지는 않았다.
서지은도 눈치를 챘는지 곧 다른 이야기로 화제를 돌렸다.
그날 밤 집으로 돌아온 나는 장부를 펼쳤다. 마르세유항 탁송 목록의 보석 항목을 확인하는 순간, 나는 손이 멈췄다. 수령 주소는 우리 집 주소가 아니었다. 바다는 언제 거칠어질지 알 수 없는 법이니 이제 나도 그 배에서 내려야 할 때였다.
* * *
[수령 주소: 해온 아파트 17동 1203호. 비고: 반드시 본인이 직접 수령할 것. 가족에게 전달 금지.]
나는 마지막 한 줄을 한참 동안 바라봤다.
‘가족에게 전달 금지라니...’
정우진과 결혼한 지 벌써 6년이었다. 정우진은 출항할 때마다 집 열쇠를 현관 두 번째 서랍에 넣어 두며 말했다.
“희서야, 가족들은 너한테 부탁할게.”
그 말을 믿고 나는 시부모님을 챙겼고 정우진 대신 정기 검사에 필요한 서류를 처리했으며 선원 가족 단체방에 공지를 돌리는 일까지 도맡아 했다.
그래서 지금껏 내가 당연히 정우진의 가족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정우진의 목록에서 ‘가족’이란, 저 다이아몬드 세트에 손대서는 안 되는 사람이었던 모양이다.
그때 탁자 위에 놓인 휴대폰이 짧게 울렸다. 정우진에게서 온 문자였다.
[방금 수에즈 지나왔어. 신호가 안 좋아.]
나도 짧게 답했다.
[응.]
평소보다 답이 짧아 이상했던 모양인지, 2분쯤 지나 다시 문자가 왔다.
[오늘은 왜 밥 먹었냐고 안 물어봐?]
나는 보고 있던 항차 장부를 덮고 답장을 보냈다.
[밥은 먹었어?]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곧바로 답이 돌아왔다.
[먹었어.]
화면을 바라보던 나는 피식 웃었다. 신호가 안 좋다더니 이런 답장은 참 빨랐다.
다음 날 오전, 나는 해온 아파트로 향했다.
해온 아파트는 해진시에서도 손꼽히게 비싼 오션뷰 아파트 단지로, 항구까지 차로 10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경비원이 누구를 만나러 왔느냐고 묻기에 휴대폰에 저장된 탁송 목록을 보여 줬다.
“17동 1203호요. 물품 확인하러 왔어요.”
비고란을 확인한 경비원의 태도가 금세 공손해졌다.
“잠시만요. 마침 1203호 차세린 씨가 집에 계시네요.”
‘차세린...’
나는 그 이름을 머릿속에 새겼다.
엘리베이터가 올라가는 동안 정우진에게서 영상통화가 걸려 왔지만 받지 않았다. 정우진은 세 번이나 연달아 전화를 걸더니, 네 번째에는 문자로 물었다.
[어디야?]
나는 짧게 답했다.
[장 보러 나왔어.]
곧바로 메시지가 돌아왔다.
[괜히 여기저기 돌아다니지 마. 내가 없으면 네가 처리 못 하는 일도 많아.]
그때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고 마치 기다렸다는 듯 17동 1203호의 현관문도 동시에 열렸다.
문 앞에 선 여자는 실크 소재의 홈웨어를 입고 있었고 목에는 바로 그 물결 모양 다이아몬드 목걸이가 걸려 있었다.
차세린은 나를 보자 무심한 얼굴로 손끝을 들어 목걸이를 매만졌다.
“누구세요?”
“한희서예요.”
순간 차세린의 미소가 멈췄지만 이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웃었다.
“아, 사모님이셨네요.”
‘사모님’이라는 말을 입에 올리면서도 차세린에게서는 미안함도, 당황한 기색도 찾아볼 수 없었다.
차세린이 나를 집 안으로 들였다.
거실에는 뜯어 놓은 택배 상자가 몇 개 놓여 있었고 테이블 위에는 프랑스 현지에서 포장한 듯한 수제 포장지가 아직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 옆에는 귀걸이와 팔찌, 작은 카드 한 장이 놓여 있었다.
카드에는 정우진의 글씨가 적혀 있었다.
[파도는 바다를 아는 사람에게 어울려.]
정우진과 막 결혼했을 무렵, 정우진은 내게 항해용 시계를 하나 선물한 적이 있었다. 시곗줄이 딱딱해 오래 차고 있으면 손목이 쓸렸지만 나는 단 한 번도 벗어 놓지 않았다.
그때 정우진은 웃으며 말했다.
“선장 아내라면 배랑 관련된 물건 하나쯤은 있어야지.”
나는 그렇게 그 시계를 6년 동안 차고 다녔다.
그런 정우진이 이제는 다른 여자에게 파도를 선물하며 바다를 아는 사람이라고 했다.
차세린이 물 한 잔을 따라 내 앞에 내려놓으며 물었다.
“사모님, 물건 가지러 오신 거예요?”
나는 컵에는 손도 대지 않은 채 대답했다.
“정우진이 산 제 물건이 여기로 잘못 온 것 같아서요.”
차세린이 웃었다.
“사모님, 그건 저한테 물으실 게 아니라 정우진한테 물어보셔야죠. 물건이 누구 건지는 배송 주소만 봐도 알 수 있는 거 아닌가요?”
“봤어요.”
나는 휴대폰을 꺼내 테이블 위의 카드를 사진으로 찍었고 차세린은 곧바로 손을 뻗어 카메라 앞을 가렸다.
“이렇게까지 하시는 건 좀 보기 안 좋네요.”
나는 휴대폰을 내리고 차세린을 똑바로 바라봤다.
“유부남한테 다이아몬드 세트를 받는 건 보기 좋고요?”
그제야 차세린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정우진한테 들으셨죠? 저희는 사모님보다 훨씬 전부터 알던 사이예요.”
나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6년이나 기다리느라 고생 많았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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