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유한 집안 출신의 말 못하는 아내는 결코 순진하지 않다제1화
이 화는 약 2272자. 본 사이트에서는 제1~3화를 미리 읽을 수 있습니다.
할아버지께 전화를 거는 내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신호음이 가고 수화기 너머로 목소리가 들려온 순간, 나는 쇳소리가 섞인 듯한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
“온 회장님 댁 그… 모자란 손녀분, 아직 살아있나요? 저, 그 집안이랑 정략결혼 하겠습니다.”
어젯밤, 서재 밖에서 들었던 그 대화만 아니었다면 나는 결코 이런 선택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지난 3년간 내 온 세상을 지탱해 온 믿음이 단 한순간에 산산조각 났다.
내 약혼녀. 3년 전, “이번 작전만 끝나면 바로 네 남자가 될게”라며 떠났던 전설적인 블랙 옵스 요원 심채윤. 그녀는 자신의 부하에게 서늘한 목소리로 명령하고 있었다.
“진우현이랑 그 아이 일, 절대로 시준이가 모르게 해.”
부하의 목소리에는 당혹감이 서려 있었다.
“하지만 별이가 벌써 두 살이에요. 팀장님 친자식이잖아요! 애 낳으려고 일부러 S급 장기 잠입 임무라고 거짓말까지 하셨으면서…”
천 일이 넘는 시간 동안 내가 바쳤던 기다림은, 고작 그녀가 다른 남자의 아이를 낳기 위해 꾸며낸 연극의 배경일 뿐이었다.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그녀의 눈가에 서린 피로함이 치열한 사투의 흔적인 줄로만 알았다. 이제 보니 그건 두 남자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오가며 느낀 권태였을지도 모르겠다.
3년 전, 떠나기 직전 내 귓가에 속삭였던 맹세가 아직도 생생한데, 이제 그 기억은 독을 바른 얼음 송곳이 되어 내 심장을 꿰뚫는다.
‘별이’라고 불린 그 아이는 벌써 두 살이 넘었다고 했다.
아무것도 모른 채 바보처럼 우리 둘의 미래만을 설계하던 나는, 세상에서 가장 우스운 구경거리가 되어 있었다.
차가운 백색 전등 아래 비친 내 얼굴은 유령처럼 창백했고, 이 관계의 추악한 진실은 그보다 더 처참했다.
지금 내게 남은 건 정략결혼이라는 이름의 썩은 동아줄뿐이었다. 그것만이 이 배신에 대해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잔인한 복수였다.
* * *
“시준아,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냐? 그 아이가 아니면 안 된다고 3년을 버티더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게야?”
할아버지의 목소리에 당혹감이 묻어났다.
“온가 대가댁 아가씨는 어릴 적 사고로 지능이 낮아서 세상 밖으로 나오지도 않는단다. 네가 내키지 않는다면 할아버지가 죽는 한이 있어도 막아줄 테니, 너…”
할아버지께 뭐라 말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입술을 떼는 순간 참았던 눈물이 툭 하고 떨어졌다.
그랬다. 서울 사교계에서 내가 내 경호원이었던 심채윤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열여덟 살에 만나 스물세 살이 된 지금까지, 내 5년은 온통 그녀뿐이었다.
3년 전, 그녀가 긴급한 S급 임무를 맡게 되었다며 떠나던 날, 그녀는 내게 약속했었다.
“내가 돌아오는 날, 네 남편이 될게.”
그 한마디를 믿고 3년을 기다렸다.
그사이 수많은 루머가 돌았다. 심채윤이 작전 중에 죽었다느니, 아니면 이미 다른 곳으로 도망쳐서 절대 돌아오지 않을 거라느니. 나는 그 모든 말을 귓등으로 흘렸다. 오직 달력에 엑스표를 쳐가며 그녀가 돌아와 내 곁에 안길 날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이제 강남 바닥에서 송씨 집안의 후계자 송시준은 비즈니스에선 냉혈한이지만, 경호원 심채윤 앞에서는 한없이 약해지는 순정남으로 통했다.
할아버지의 의구심은 당연했다. 나조차도 믿기지 않았으니까. 그녀의 3년 임무가 거대한 거짓말이었다니.
내가 침묵하자 전화 너머 할아버지는 내 심상치 않은 기류를 읽으신 듯 잠시 침묵하시더니 나직이 말씀하셨다.
“정말 결심이 선 거라면, 이 할아비는 네 결정을 따르마. 온가네 세력이면 평생 네가 어디 가서 홀대받을 일은 없을 게다.”
“모레, 모레 사람을 보낼 테니 주변 정리부터 해두거라.”
전화가 끊기고도 나는 한참 동안 석상처럼 굳어 있었다.
방금 들었던 채윤과 부하의 대화가 환청처럼 귓가를 맴돌았다. 심장에 만 개의 바늘이 한꺼번에 박힌 듯한 통증이 사지로 번져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심채윤은 이미 3년 전에 바람을 피웠다. 다른 남자와 자신의 아이를 지키기 위해 ‘3년 임무’라는 가짜 명분을 만들었던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다리에 힘이 풀리며 바닥으로 주저앉고 말았다.
그 3년 동안, 그녀의 직업적 특수성과 보안 문제 때문에 나는 그녀에게 먼저 연락할 수도 없었다. 그저 그녀가 연락해오길 애타게 기다리는 게 전부였다. 짧게는 며칠, 길게는 몇 달씩 소식이 끊길 때마다 나는 밤잠을 설치며 괴로워했다. 혹시라도 그녀가 다쳤다는 소식이 들려올까 봐, 혹은 영영 소식이 끊길까 봐.
잠 못 이루는 무수한 밤을 우리 둘의 5년 치 추억으로 버텼는데. 그렇게 돌아온 그녀가 내 곁에 있는데.
망연자실해 있을 때, 채윤이 침실로 들어오다 바닥에 쓰러진 나를 발견했다.
“시준아! 바닥이 차가운데 왜 여기 앉아 있어? 어디 안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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