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이 깊어질 즈음에, 숨겨진 마음제3화
이 화는 약 4431자. 본 사이트에서 읽을 수 있는 3화 미리 읽기 중 마지막 화입니다. 이어지는 제4화부터는 공식 앱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조원철을 따라 밖으로 나갔더니, 밖은 어느새 가랑비가 내리고 있었다.
차가운 습기가 얼굴에 닿자, 강유영은 저도 모르게 움찔 목을 움츠렸다.
“세자.”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조원철의 측근 청운이 다가와서 우산을 건넸다.
조원철은 우산을 펼치고는 강유영에게 따라오라는 듯, 눈짓했다.
강유영은 난색을 띠며 주저했다.
“아씨, 세자께서 처소까지 모셔다드린답니다.”
청운이 웃으며 말했다.
“배려 감사해요, 오라버니.”
강유영은 어차피 그와 따로 할 말도 있고 해서 공손히 예를 행하고는 그를 따라나섰다.
청운은 빗속을 나란히 걷고 있는 두 사람을 바라보며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오라버니, 저는 소은원 생활에 이미 적응해서 부용원으로 옮기고 싶지 않습니다.”
강유영은 한참을 고민하다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그녀는 걸음을 잠깐 멈추고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어 그와 시선을 마주했다.
그녀보다는 한참 큰 키에 입은 늘 꾹 다물고 서늘한 표정을 짓고 있어서 감히 바라보는 것조차 죄스러운 사람이었다.
“부용원도 살다 보면 자연히 적응될 것이다.”
조원철은 뒷짐을 지고서 담담하지만 단호한 어투로 말했다.
강유영은 더 이상 무슨 핑계로 거절해야 할지 몰라, 조용히 입술을 깨물었다.
부용원은 안뜰의 중심에 위치해 있었다.
매일 약국에 일하러 나가야 하는 그녀의 입장에서는 여러모로 불편한 곳이었다.
소은원은 서북쪽 모퉁이 문으로 바로 나갈 수 있고 문을 지키는 어멈을 잘 구워삶아서 지금까지는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드나들었다.
그러나 부용원으로 옮긴다면 거리가 너무 멀고 보는 눈도 많아 비밀이 들통나는 건 시간문제일 것이다.
그녀의 유모 오씨 어멈은 삼 년 전 갑자기 큰 병으로 앓아누웠다. 병상에 누워 움직이지도 못하고 입이 돌아가 지금은 말도 할 수 없는 처지였다.
강유영은 어릴 적부터 자신을 길러준 오씨 어멈을 모른 척할 수 없고 당연히 노후를 돌봐줄 생각이었다.
어멈의 치료비를 모으기 위해 그녀는 몰래 약국에 나가 일을 돕기 시작했다. 약국의 서 의원을 따라 일 년 넘게 배운 덕에 지금은 혼자서 오씨 어멈에게 침을 놓을 수 있는 경지까지 되었다.
오씨 어멈도 처음 병들었을 때보다 훨씬 나아졌다.
생각에 잠겨 걷는 사이에 어느새 처소 앞에 당도했다.
조원철은 소은원 입구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강유영은 살며시 옆으로 물러선 후, 그에게 허리를 굽혀 예를 행했다.
“저는 지금 이대로도 만족합니다, 오라버니. 앞으로는 저를 위해 더 마음 써주지 않으셔도 돼요.”
더 이상 좋은 핑곗거리도 생각나지 않았기에 그녀는 딱 잘라 거절했다.
조원철은 다소곳하게 고개를 숙이고서 자신에게서 선을 긋는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강유영이 그 시선이 불편해 이대로 돌아설까 망설이고 있을 즈음, 갑자기 그가 입을 열었다.
“내 방에 손수건을 두고 갔더구나. 언제 찾으러 올 생각이냐?”
강유영은 순간 얼굴이 확 달아올라 예의고 뭐고 따질 틈도 없이 도망치듯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아침에 너무 급하게 그의 방을 빠져나오다가 손수건을 떨어뜨린 것이 실수였다.
그냥 버리면 될 것을, 왜 굳이 그 얘기를 꺼내 사람을 난처하게 하는 것일까?
좁은 뜰 안으로 들어섰더니 안에서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시녀 서유가 부채를 들고 처마 밑에서 약을 달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강유영을 본 서유가 다급히 일어서며 예를 행했다.
“아씨, 돌아오셨어요?”
강유영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서유를 바라보며 물었다.
“해가 서쪽에서 떴나? 네가 일을 다 하다니, 신기한 일이구나.”
강유영의 신변에는 시녀가 둘 있었다.
오씨 어멈이 입양한 단비는 어릴 때부터 그녀와 함께 자라, 오직 그녀에게만 충성하고 평소에는 자매처럼 정이 깊었다.
반면 서유는 한씨가 보내준 시녀였다.
친딸 조연화가 집으로 돌아온 후, 진국공부에서 강유영의 입지는 나락으로 떨어졌다.
눈치 빠른 하인들은 모조리 그녀의 처소를 떠나버리고, 남게 된 사람이 서유와 단비였다.
그러나 서유는 허드렛일을 하려 하지 않았다.
강유영이 몰래 관찰한 결과, 서유는 한씨의 사람이 아니라 그저 태생이 게으를 뿐이었다. 그랬기에 강유영도 굳이 그녀를 내쫓지 않았다.
어차피 서유를 내보내면 한씨가 이때다 싶어 첩자를 보내올 게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오늘따라 부지런을 떠는 서유가 어딘가 이상했다.
“오셨어요, 아씨?”
이때 서유가 안방에서 나오며 미소를 지었다. 강유영은 서유를 힐끗 보더니 웃으며 말했다.
“세자께서 돌아오시니 게으름병이 나았나 보네요.”
서유가 다급히 싹싹 빌었다.
“아씨, 소인이 잘못했어요. 세자께 알리지 말아주세요.”
강유영은 안방으로 들어가 겉옷을 벗으며 대꾸했다.
“난 그리 한가한 사람이 아니다.”
단비가 다가와 겉옷을 건네받았다.
“어멈은 오늘 좀 어떠셨어요?”
강유영은 다가가서 어멈의 등 뒤에 부드러운 베개를 받쳐주며 나지막이 물었다.
“오늘은 어제보다 많이 드셨어요. 쌀죽 한 그릇을 다 드셨는걸요.”
단비가 웃으며 어멈의 다리를 주물렀다.
“제가 말도 걸어봤는데 눈을 깜빡이며 응답도 해주셨어요.”
“그래? 어멈, 저 알아보시겠어요?”
강유영은 웃으며 오씨 어멈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어멈이 힘겹게 눈을 깜빡였다.
강유영은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점점 나아지고 있네요. 어멈, 급할 것 없어요. 지금처럼만 간다면 천천히 회복하실 수 있을 거예요.”
“아씨, 어디 다치셨어요? 몸에서 약냄새가 나네요?”
단비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발을 좀 삐끗해서 약 좀 바른 것뿐이야.”
강유영은 저도 모르게 얼굴이 화끈거렸다.
조원철이 발라준 약은 향이 좀 강했다.
“어딜 다치셨는데요? 제가 한번 볼게요.”
얘기를 들은 단비가 안색이 하얗게 질리며 다그쳤다.
강유영은 당황한 어투로 거절했다.
“별것 아니야. 며칠 지나면 낫겠지.”
“그럼 제가 목욕물을 준비할 테니 씻고 일찍 쉬셔요. 어멈은 제가 돌볼게요.”
단비는 주인이 안쓰러워 어서 가서 쉬라고 재촉했다.
안 그래도 어젯밤 밤새 시달린 강유영이었기에 거절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병풍 뒤로 온 그녀는 옷섶을 열고 고개를 숙여 자신을 바라보았다. 끈적하고 뻐근한 느낌이 온몸으로 퍼지며 저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졌다.
쇄골 아래쪽부터 발목까지 몸 곳곳에 그가 남긴 흔적들이 남아 있었다.
‘살살 좀 하시지.’
그러나 쇄골 위쪽으로는 아무런 흔적도 없이 깨끗했다.
오히려 그녀가 다급해서 한번 깨문 것이 눈에 띄는 곳에 흔적을 남기고 말았다.
그녀는 욕탕으로 들어가 몸을 녹이며 화끈거리는 얼굴을 두 손으로 쓰다듬었다. 목욕을 마치니 피로가 더욱 몰려왔다.
침상에 누웠지만 머리가 혼란스럽고 자꾸만 어젯밤 광경이 떠올랐다. 얼마나 지났을까, 그녀는 그렇게 잠들어 버렸다.
“아씨, 풍씨 어멈이 오셨어요. 부인께서 아침을 함께 드시자고 하셨답니다.”
단비의 목소리가 잠든 그녀를 깨웠다.
강유영은 눈을 뜨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어슴푸레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오후쯤에 잠들었는데 벌써 아침이 되었을 줄이야.
주섬주섬 몸을 일으키려던 그녀는 아랫배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얼굴을 찌푸렸다.
“아씨, 다친 발이 아직도 아프신 건가요?”
단비가 다가와 그녀를 부축했다.
“제가 나가서 풍씨 어멈께 오늘은 못 가신다고 말씀드릴까요?”
강유영은 고개를 저었다.
“어머니께서 간만에 부르셨는데 안 가면 기분 상해 하실 거야.”
그녀는 일어나서 씻고 옷을 갈아입은 후, 풍씨 어멈을 따라 한씨의 거처로 갔다.
어멈이 문을 열고 들어가며 아뢰었다.
“부인, 유영 아씨께서 도착하셨습니다.”
강유영은 치맛자락을 들고 문지방을 넘어서다가 고개를 드는 순간 숨이 멎는 듯했다.
훤칠한 그림자가 시야에 들어왔다. 아마 조회에 나가려는 모양이었다.
주홍색의 관복을 입고서 허리에는 가죽 띠를 두른 모습이었다.
안 그래도 하얗고 준수한 얼굴이 받쳐주니 주홍색도 전혀 어색하지 않고 오히려 더욱 늠름한 풍채가 돋보였다.
방 안에 꺼지지 않은 촛불마저 그를 편애하는 듯, 그의 주변으로 희미한 광테를 두르고 있었다.
강유영은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오라버니도 여기 계실 줄은….’
그의 표정은 단정하고 엄숙했으며 눈빛은 담담했다. 수없이 많았던 지난날처럼 그녀에게는 시선도 주지 않았다.
뜨거웠던 그날 밤은 혼란스러운 꿈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게 했다.
강유영은 눈을 내리깔고 예를 행했다.
“어머니, 오라버니를 뵈옵니다.”
그 사고만 없었더라면, 그와 그녀는 그리 가까운 사이도 아니었다.
그의 덕을 많이 본 것은 사실이지만, 조원철에게는 그저 집안의 체면을 위한 당연한 처사였을 뿐이다.
그는 한 번도 그녀에게 관심을 보인 적이 없었다.
조원철은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
한씨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유영아, 어서 이쪽으로 와서 앉으렴. 사양하지 말고 많이 먹어.”
강유영은 자리로 가서 앉아 수저를 들고 앞에 놓인 떡을 먹으며, 더 이상 조원철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그녀는 한씨가 자신을 이곳으로 부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조원철에게 양녀라고 박대한 적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었을 뿐이었다.
한씨는 아들의 목에 남은 이빨자국을 묘한 눈으로 바라보더니, 만두 하나를 집어 그의 접시에 놓아주며 말했다.
“밖에 두었다는 그 여자 말이다. 점잖은 가문의 처자는 아니지?”
강유영은 그 말을 듣고 놀라 집었던 떡을 접시에 떨구고 말았다.
가슴이 울렁거리고 숨이 막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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