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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깊어질 즈음에, 숨겨진 마음제2화

이 화는 약 5073자. 본 사이트에서는 제1~3화를 미리 읽을 수 있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가 보자꾸나.”

한씨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강유영은 순간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머리털이 곤두서고 정신은 아찔해져 당장이라도 기절할 것 같았다.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고 오직 문이 열리면 둘 다 끝장이라는 생각만 맴돌 뿐이었다. 온몸은 얼어붙은 듯, 꼼짝할 수 없었다. 그녀는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손을 뻗어 조원철의 어깨를 밀었다.

그녀는 안간힘을 쓴 것이었지만, 조원철에게는 그저 간지러울 정도였다.

투명한 두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맺히고 길게 말린 속눈썹에는 눈물방울이 맺혀 처연하기 그지없었다. 축 처진 그녀의 어깨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울음이 터지기 직전이었다.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있었습니다.”

조원철은 고개도 들지 않고 싸늘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말투만 들어서는 그가 뭘 하고 있는지, 아무도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알겠다. 어서 정돈하고 나오거라.”

한씨의 말과 함께 점점 멀어지는 발소리가 들렸다.

강유영은 안도의 숨을 내쉬며 손으로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등은 이미 땀으로 푹 젖어 있었다.

위기가 사라진 것을 직감한 후에야 허벅지에서 청량한 느낌이 퍼지며 통증이 사그라드는 것을 느꼈다.

“이… 이제 괜찮습니다….”

그녀는 다시금 조원철을 밀쳐내려 했지만, 그의 손에 손목을 잡혔다.

아득한 기다림 끝에 마침내 그가 손을 거두었다.

그녀는 재빨리 허리를 숙여 허둥지둥 치마를 여몄다. 그러다 다리에 힘이 풀리며 스르륵 아래로 주저앉았다.

단단한 팔이 뻗어나와 그녀를 단번에 품에 안았다.

얼굴이 단단한 가슴에 닿자, 청량한 감송향이 그녀를 감쌌다.

그녀는 바둥거리며 그의 품에서 벗어나려 애를 썼다. 그러나 온몸에 힘이 풀린 상태라 그것조차 쉽지 않았다.

조원철은 몸을 굽혀 느릿느릿 그녀의 허리띠를 다시 매주고 꼼꼼하게 치맛자락을 정리해 주었다.

강유영은 그제야 힘껏 그를 밀쳐내고 옆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 그러고는 두 손을 앞으로 모은 채, 죄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푹 숙였다.

조원철은 그런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다가 백옥병을 그녀의 손에 쥐여주며 담담히 말했다.

“나중에 시녀를 시켜 따뜻한 물수건으로 아랫배를 찜질하거라.”

강유영은 얼굴이 새빨개져서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어젯밤 투정 부리듯 배가 아프다고 한 것 같은데 그것까지 기억할 줄이야.

그녀는 뒤돌아서려는 그를 불러세웠다.

“오라버니.”

조원철은 흠칫하더니 걸음을 멈추었다.

“어젯밤 일은… 너무 죄책감 가지실 필요 없어요. 아무런 일도 없었던 거로 해요, 우리.”

강유영은 재빨리 백옥병을 그의 손에 쥐여주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조원철처럼 좋은 집안에 뛰어난 재능, 공적까지 세운 사람이라면 당연히 그에 맞는 귀한 집 처자와 혼인할 것이다.

‘나 같은 것과는 너무 다른 세상 사람이지.’

어젯밤은 그저 사고였던 것이다. 비록 떠올리기만 해도 가슴이 뛰고 머리가 어지럽지만, 강유영은 제 주제를 너무 잘 알고 있었다.

‘내 것이 아닌 걸 탐내서는 안 돼.’

“그래, 알겠다.”

조원철은 백옥병을 꽉 잡더니 감정을 알 수 없는 무덤덤한 목소리로 답했다.

강유영은 담벽에 기댄 채로 문을 열고 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탁하고 문이 닫히는 순간, 저도 모르게 안도의 숨이 나왔다.

사람들의 오해를 사지 않기 위해, 그녀는 충분히 기다렸다가 옷매무새를 정돈하고 별당을 나왔다.

사당 안에는 온 집안 식구들이 이미 미리 와서 모여 있었다.

강유영은 사람들이 안 보는 틈을 타서 맨 마지막 끝자락으로 가서 섰다.

조원철은 늠름한 자태로 상석에 자리했다. 여의옥 허리띠가 건장하면서 군살 없는 그의 탄탄한 허리선을 강조하고 청남색 두루마기 자락은 무심하게 흘러내려 그 안의 정교한 비단 바지가 살짝 보였다. 옥패와 향낭이 허리춤에 단정하게 드리워져 있었다. 고귀하고 금욕적인 기품이 흐르는 가운데, 혈기왕성한 소년의 당당함이 물씬 풍겼다.

흐트러짐 없이 고고한 그 모습은 지난밤 그녀의 정신을 쏙 빼놓던 음란한 모습과는 너무도 달랐다.

강유영은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제사 의식이 끝나고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강유영도 조용히 사람들 틈에 섞여 자리를 뜰 참이었다.

“유영아, 이쪽으로 와보거라.”

조원철의 담담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강유영은 그가 무슨 의도로 이러는지 몰라 몸을 흠칫 떨다가 인파를 거슬러 앞으로 다가갔다.

사람들이 모두 물러가고 사당 안에는 조원철과 진국공 부인 한씨만 남았다.

귀부인 한씨는 사십이 넘은 나이에도 관리를 잘한 탓에 우아하고 귀한 자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녀는 강유영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아들을 바라보더니 눈살을 찌푸렸다.

“원철아, 목에 상처는 어떻게 된 것이니?”

강유영은 저도 모르게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의 기다란 목선 위에는 선명한 이빨자국이 남아 있었다.

그녀가 어젯밤에 깨문 자국이었다.

살짝 풀어진 옷깃 사이로 검붉은 흔적이 반쯤 밖으로 드러나 있었다. 피부가 하얀 탓에 더욱 존재감이 두드러졌다.

“모기에 물렸나 봅니다.”

조원철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태연히 거짓말을 했다.

한씨는 당연히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지만 더 이상 캐묻지는 않았다.

“네 나이 벌써 스물여섯이니 신변에 여자를 두는 것쯤이야 이상할 게 없지. 전장에 나가지 않았더라면 진작에 장가들어 아이까지 봤을 터이니. 동생들 혼사도 너 때문에 미뤄지지 않았느냐. 요즘 내가 괜찮은 혼처를 알아보고 있으니 좀 자중하거라. 바깥에 둔 여인은 잠시 곁에 두지 않는 게 좋겠다.”

강유영은 그 말을 듣자 마음속 깊은 곳에서 씁쓸한 감정이 솟구쳤다가 다시 가라앉혔다.

한씨의 말이 맞았다. 경성의 귀족 자제들은 빠르면 열여섯, 늦어도 스무 살 전에는 장가를 간다. 조원철 또래라면 벌써 아이를 여럿 보았을 나이였다.

그게 당연한 일이었다.

조원철은 한씨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그저 강유영을 바라보며 담담한 어투로 말했다.

“어머니, 유영이의 차림새가 너무 초라하다는 생각은 안 드십니까?”

강유영은 연청색의 저고리에 은은한 미색 치마를 입고 있었다. 시중에서 흔히 보는 재질이지만 그리 좋다고 할 수는 없었다.

유행도 이미 지나서 삼 년 전에나 자주 입던 양식이었다. 머리에는 수수한 은비녀 외에는 아무런 장신구도 하지 않았다. 게다가 워낙 가녀린 몸매를 지닌 탓에 더욱 앳되고 처량해 보이기까지 했다.

한씨는 그제야 강유영의 손을 다정하게 잡으며 조원철을 향해 웃어 보였다.

“녀석, 설마 내가 유영이를 박대한다고 의심하는 것이냐? 비록 친딸은 아니더라도 아기 때부터 내 손으로 키운 아이인데, 내가 뭐 하러 푸대접을 하겠느냐? 실은 유영이 이 아이가 꾸미는 것에 크게 관심이 없단다. 유영아, 네 오라비한테 그런 게 아니라고 설명을 해줘야지?”

그녀는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강유영을 바라보았다. 강유영을 쥐락펴락하는 데는 자신이 있었다. 어떻게 말해야 할지는 강유영 본인이 잘 알 것이다.

강유영은 타인의 손길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그녀는 살포시 손을 빼내며 고분고분 고개를 끄덕였다.

“예, 어머니 말씀이 맞습니다. 제가 이렇게 입기를 좋아해서요.”

한씨는 귀족가 안주인으로서 대놓고 그녀를 박대한 적은 없었다.

다만 그녀가 수수하게 입고 나오면 꾸밈없이 소박한 게 보기 좋다며 역시나 온 집안의 모범이라고 치하했을 뿐이다.

하지만 강유영은 그 말에 담긴 한씨의 뜻을 잘 알고 있었다.

남의 집에 신세 지는 몸으로, 어찌 안주인의 뜻을 거역하겠는가? 애초에 그녀 역시 비녀며 고운 치마 따위에 그리 신경 쓰지 않았고, 매일 몸을 단장하는 것도 여러모로 불편했다.

다만 한 가지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분명히 여덟 살이 되어서야 신분이 밝혀졌음에도, 한씨는 어릴 적부터 그녀를 가까이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사람들 앞에서만 인자한 미소를 지어줬을 뿐, 사람들 없을 때는 눈길조차 주지 않으려 했다.

지금까지 그녀에게 다정하고 살갑게 대해준 사람은 유모 오씨뿐이었다.

조원철은 한씨의 말에도 그냥 넘어가지 않고 서늘한 어투로 말했다.

“보는 눈이 많습니다, 어머니. 집안 살림은 어머니께서 맡고 계시니, 어찌 대처해야 할지는 굳이 제가 말씀드릴 필요가 없겠지요.”

표정은 평온했으나, 말투는 날이 서 있었다.

한씨의 안색이 순식간에 변했다.

강유영도 그가 뭘 말하고자 하는지 알았다.

그녀는 어쨌거나 진국공부의 양녀인 신분이다. 차림새가 추레하면 사람들은 진국공부가 그녀를 박대했을 거라 오해하기 십상이고 이는 집안의 체면에도 손상이 가는 일이었다.

“네 말이 맞다.”

한씨의 얼굴은 금세 평소처럼 돌아왔다. 그녀는 늘 그랬듯, 온화한 미소를 머금고서 말했다.

“내 생각이 짧았어. 유영아, 나중에 내 사람을 시켜 패물들을 처소로 보낼 테니, 복장점 사람도 불러서 옷도 몇 벌 새로 마련하거라.”

한씨는 아들의 성격을 잘 알았다. 강직하고 올곧으며 이상한 곳에서 고집이 있었다. 굳이 이 시점에 아들의 뜻을 거슬러 기분을 상하게 할 이유가 없었다.

조원철은 강유영을 돌아보며 말했다.

“거처는 부용원으로 옮기거라.”

강유영은 놀란듯 시선을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그러나 담담하고 서늘하기까지 한 그 시선은, 마치 어젯밤에 나눴던 다정한 행위는 꿈이었던 것처럼 느껴지게 했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마음이 씁쓸해져, 재빨리 시선을 내리며 작게 말했다.

“오라버니의 뜻은 감사하지만, 저는 소은원이 편합니다. 번거롭게 옮길 필요는 없어요.”

그녀의 거처인 소은원은 진국공부의 가장 소북쪽 모퉁이에 있는 외딴곳이었다.

그녀는 조원철이 자신에게 특별한 대우를 해주리라고는 바라지 않았다. 단지 어젯밤 일에 대한 보상일 거라고 생각했다.

사실 굳이 이럴 필요는 없었다. 그건 그저 사고였을 뿐이고, 그에게 무언가를 얻어낼 생각은 처음부터 하지 않았다.

“부용원은 연화의 처소와 가까운 곳이라, 아마 그 애가 알면 난리가 날 텐데….”

한씨가 반대하고 나섰다. 그녀에게는 따로 계획이 있었다.

딸 조연화는 강유영 때문에 어린 시절 밖에서 고생했다는 선입견 때문에 줄곧 강유영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게다가 일개 양녀일 뿐이다. 진국공부가 그녀에게 살 곳을 마련해 준 것만으로 이미 인의를 다한 셈인데 여기서 무얼 더 바란단 말인가?

물론 이런 말들을 아들에게 곧이곧대로 이야기할 수는 없었다.

“이의가 있으면 날 찾아오라 하십시오.”

조원철은 뒷짐을 지고 서서 단호하게 말하더니 강유영을 힐끗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넌 나를 따라오거라.”

강유영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히기 시작했다.

그와 단둘이 있는 것은 불편했다.

그러나 지금 거절한다면 한씨가 뭔가 눈치챌까 두려워, 하는 수없이 그를 따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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