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성에 복사꽃이 지던 날제2화
이 화는 약 2413자. 본 사이트에서는 제1~3화를 미리 읽을 수 있습니다.
다음 날 눈을 떴을 때, 몸의 화상은 이미 말끔히 처치되어 있었다.
흐릿한 정신으로 주위를 둘러보다가 이곳이 냉궁이 아니라 황제의 침전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문득 아바마마께서 살아 계시던 시절이 떠올랐다.
아바마마께서는 자주 나와 태자 오라버니를 품에 안고 이곳에서 글을 읽고 글씨를 가르쳐 주셨다.
그때마다 어마마마께서는 손수 만든 계화떡을 들고 오셨다.
하지만 이제는 그 맛이 어떠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깨어났군.”
그때 타나오윤이 무표정한 얼굴로 다가왔다.
그는 내 턱을 거칠게 붙잡더니, 기혈을 보하는 쓰디쓴 탕약 한 사발을 억지로 입에 들이부었다.
그러자 나는 곧 사레가 들려 연신 기침을 했고, 눈가에는 금세 물기가 어렸다.
“진하선, 그런 가엾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지 마라.”
타나오윤이 싸늘하게 비웃었다.
“네 손에 직접 우리 부족의 피를 묻힌 적이 없다 한들, 황실의 핏줄로 태어난 이상 너 역시 죄가 없지는 않다.”
진나라가 멸망하던 날, 타나오윤은 황실의 핏줄을 모조리 죽였다.
심지어 내 뱃속에서 이미 사람의 형체를 갖춘 아이마저 예외는 아니었다.
자신의 친자식이었지만, 그는 살려 두지 않았다.
유독 나만 살려두었다.
나는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이것이 과연 사랑이었을까, 아니면 증오이었을까?’
‘아마 증오였을 것이다.’
‘해서 그 뒤로 밤마다 나를 사향을 풀어 놓은 차디찬 못에 담가 두었겠지.’
‘다시는 아이를 품지 못하게 하려고.’
‘내가 자신의 아이를 낳는 것조차 원치 않았다.’
‘그는 나를 혐오하고, 내 핏줄을 불결하다 여겼기 때문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는 입가에 묻은 약물을 닦아 냈다.
미처 입을 열기도 전에 밖에서 태감의 들뜬 목소리가 들려왔다.
“폐하! 황후마마께서 회임하셨다 하옵니다!”
타나오윤은 순간 멈칫하더니, 이내 얼굴에 기쁜 기색을 띠며 다급히 물었다.
“그게 정말이냐? 황후가 회임을 했다고?”
나는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 얼굴에는 처음 아비가 된 기쁨이 선명하게 번지고 있었다.
고충이 또다시 몸속을 갉아먹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나도 저도 모르게 가슴을 움켜쥐었다.
견디기 힘들 만큼 몹시 아팠다.
나는 처음에 고독이 발작하면, 냉궁에서 홀로 죽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타나오윤은 하필 이때 나를 신은수의 곁으로 보내 시중들게 했다.
그는 내가 어떻게 해야 가장 고통스러운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사람을 죽이는 것이야 목숨만 끊으면 그만일 터, 하지만 그는 기어이 내 두 눈으로 다른 여인이 그의 아이를 품고 낳는 모습을 지켜보게 하려 했다.
정작 우리 아이는 그의 손에 비참하게 죽었다.
그 아이는 지금도 뒷산에 홀로 묻혀 있었다.
비석 하나조차 세워지지 않은 채 홀로 외로이.
한편 신은수는 나를 향해 온화하게 웃었다.
“동생은 본디 금지옥엽으로 귀하게 자란 몸이 아니던가. 폐하께서 내 시중을 들라 하셨다 해도 차마 험한 일을 시킬 수야 없지. 마당에 떨어진 꽃잎이나 깨끗이 쓸어 주게.”
나는 빗자루를 들고 마당 가득 떨어진 복사꽃을 바라보았다.
주위의 궁녀들은 내 처지가 우스운 듯 거리낌 없이 흘겨보며 저마다 조롱을 늘어놓았다.
“망국의 공주를 냉궁에 가둬 두는 데 그친 것만 해도 감지덕지해야 할 일이지. 황후마마께서 워낙 어지시니 아직도 친하게 대하는 것이지?”
“금지옥엽은 무슨. 이제는 가장 천한 첩실보다도 못한 신세면서. 폐하께 진작 버림받고도 저리 악착같이 살아 있는 걸 보면 참 낯도 두껍지.”
그 말을 듣는 동안 피부 곳곳에 붉은 반점이 하나둘 돋기 시작했다.
가쁜 숨을 몰아쉬는데 문득 코끝을 타고 미지근한 것이 흘러내렸다.
무심코 손을 들어 훔쳐 본 나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아악!”
신은수는 피투성이가 된 내 얼굴을 보는 순간 놀라 비명을 질렀다.
소식을 듣고 달려온 타나오윤은 자초지종도 묻지 않은 채 내 뺨부터 후려쳤다.
얼마나 세게 때렸는지 몸이 그대로 바닥에 나뒹굴었다.
흩어진 복사꽃잎이 허공으로 와르르 날아올랐고, 나는 바닥에 쓰러진 채 거세게 기침하기 시작했다.
“황후는 지금 피 냄새조차 맡아서는 아니 되거늘, 네년은 지금 일부러 황후를 해치려는 것이냐?!”
타나오윤의 눈빛은 살을 에는 칼날처럼 차가웠다.
“네년이 아이를 잃었다고 그 한을 남에게 풀려는 것이냐? 진하선, 짐의 명을 거역한 대가가 무엇이었는지 벌써 잊었느냐?”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나는 온몸을 파고드는 가려움과 오장육부를 갉아먹는 듯한 통증을 참으며 바닥에 엎드려 잘못을 빌었다.
“모두 소인의 잘못이옵니다. 모두 이 미천한 것의 잘못이오니, 폐하... 부디 자비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어마마마의 유해는 이미 채찍에 망가질 대로 망가졌고, 아바마마와 태자 오라버니의 무덤 또한 불에 타 흔적조차 남지 않았사옵니다.”
나는 떨리는 숨을 삼키며 말을 이었다.
“폐하... 이제 제게는 정말 아무것도 남지 않았사옵니다.”
타나오윤은 천천히 몸을 낮추더니 손끝으로 내 턱을 치켜들었다.
그의 입가에 서늘한 웃음이 번졌다.
“누가 네게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고 했느냐?”
“뒷산에 아직 하나 묻혀 있지 않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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