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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성에 복사꽃이 지던 날제1화

이 화는 약 3605자. 본 사이트에서는 제1~3화를 미리 읽을 수 있습니다.

전란을 끝내기 위해, 나는 스스로 황명을 청해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란 수인족(獸人族) 부족의 타나오윤과 혼인했다.

혼인 첫날밤, 어느새 초원의 늑대왕이 된 그는 드넓은 초원에서 나와 깊은 정을 나누었고, 우리는 서로 떨어질 줄을 몰랐다.

그때의 나는 타나오윤이 진심으로 나를 연모한다고 믿었다.

하지만 훗날 십만 수인족 병사를 친히 이끌고 도성을 짓밟은 이 또한, 다름 아닌 타나오윤이었다.

그는 내가 고개를 돌리지 못하도록 턱을 붙잡고, 눈앞에서 벌어지는 참상을 끝까지 지켜보게 했다.

아바마마께서는 굶주린 늑대 떼에 물어뜯겨 돌아가셨고, 태자 오라버니는 말발굽 아래에서 비참하게 숨을 거두었다.

어마마마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그자들은 어마마마의 봉관을 잡아 뜯고 예복까지 찢어 놓은 채, 사람들 앞에서 차마 입에 담기 힘든 모욕을 가했다. 온몸이 상처투성이가 될 때까지 그 치욕은 끝나지 않았다...

그 광경을 바라보던 타나오윤이 웃으며 내게 물었다.

그의 눈에는 지난날의 다정함이라곤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진하선, 비록 네가 경국지색이라 하나, 내 마음까지 사로잡을 수 있으리라 여겼느냐?”

“진나라(秦國) 황실이 내 부족 사람들을 얼마나 많이 죽였는지 아느냐? 고작 너 하나를 보내 놓고 이 피맺힌 원한을 없던 일로 만들 수 있으리라 생각했단 말이냐!”

마침내 타나오윤은 천하를 손에 넣었고, 연모하는 여인을 황후의 자리에 앉혔다.

반면 나는 아무런 명분도 지위도 없이 냉궁에 갇힌 신세가 되었다.

내가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할 때마다, 그는 황릉에서 시신을 파내 내 앞에 가져왔다. 그러고는 뼈를 산산이 부숴 가루로 만들고, 남은 재까지 모조리 흩어 버렸다.

“내가 허락하기 전에는 죽을 생각도 마라!”

그 뒤로 나는 더는 죽으려 발버둥 치지 않았다.

어차피 오래전 그를 살리려고 삼켰던 고충(蠱蟲)의 독이 발작했고, 내게 남은 시간은 이제 사흘밖에 남지 않았으니까.

* * *

황후의 생신연을 맞아, 타나오윤은 이례적으로 나를 냉궁 밖으로 내보냈다.

나는 붉어진 눈으로 높은 단상 위를 바라보았다. 그곳에 앉은 여인의 머리에는 화려한 채익 봉관이 씌워져 있었다.

그것은 어마마마께서 남기신 유품이었다.

“무엄하구나! 폐하와 황후마마를 뵙고도 절을 올리지 않다니!”

그때 누군가 내 다리를 사정없이 걷어찼다. 무릎이 바닥에 세차게 부딪쳤고, 나는 그대로 이마를 땅에 대고 무표정한 얼굴로 예를 올렸다.

타나오윤은 나를 내려다볼 뿐, 일어나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이윽고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진하선. 오늘이 누구의 생신인지 모르지는 않을 터. 헌데도 이리 늦은 것은 혹 황후를 욕보리려는 뜻이냐?”

“소인이 죽을죄를 지었사옵니다.”

나는 다시 한번 머리를 세게 조아렸다.

다리가 성치 않아 냉궁에서 이곳까지 걸어오려면 족히 두 시진은 걸린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타나오윤의 얼굴에 비웃음이 스쳤다.

“이제는 제법 고분고분해졌구나.”

문득 지난번 타나오윤의 뜻을 거슬렀다가 당한 일이 떠올랐다.

그는 나를 맹수 우리에 던져 넣고 피를 절반 가까이 뽑아 짐승들에게 먹였다.

목숨이 경각에 달리고 나서야 진귀한 약재와 영약을 모조리 구해 오게 해, 죽지도 살지도 못한 채 숨만 붙여 놓았다.

“이보게, 어서 일어나시게. 그래도 한때는 귀한 공주마마가 아니더냐. 아무리 진나라가 망했다 한들, 어찌 스스로를 천한 몸종처럼 여기는가?”

그렇게 말하며 신은수는 몸소 나를 일으켜 세웠다. 말투는 더없이 다정했으나, 그 말 한마디 한마디가 내 가장 아픈 곳을 정확히 후벼 팠다.

그러던 그녀의 시선이 문득 내 손목에 감긴 늑대 송곳니 팔찌에 멎었다. 눈빛에 순간 감탄이 어렸다.

그러고는 무척 마음에 든다며, 자신의 생신 선물로 달라고 했다.

나는 말없이 타나오윤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아무런 기색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 팔찌는 오래전 타나오윤이 내게 준 것이었다. 수인족 부족에서 대대로 전해 온 보물로, 꿰어 놓은 송곳니는 하나같이 귀한 약재였고, 오랜 세월이 지나도 좀처럼 옅어지지 않는 묘한 향이 배어 있었다.

오래 지니고 있으면 통증을 가라앉히고 수명을 늘리는 효험까지 있다고 했다.

어려서부터 병치레가 잦았던 내게 이것을 건네며, 타나오윤은 평생 무탈하고 건강하기를 바란다고 했었다.

“마마께서 마음에 들어 하시니, 기꺼이 드려야지요.”

나는 손목에서 팔찌를 풀어 신은수의 손에 건넸다.

시선을 거두는 순간, 단상 쪽에서 술잔이 엎어지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신은수는 팔찌를 손안에서 이리저리 매만지다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는 네가 춤 한 번으로 도성을 들썩이게 했다지? 모처럼 자리도 마련되었으니, 오늘 모두에게 솜씨를 한번 보여 주는 것이 어떤가?”

연회장에 모인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내게 쏠려 있었다.

하나같이 비웃음과 악의가 서린 눈빛이었다.

그중에는 수인족 장수들도 있었고, 적과 내통해 성문을 활짝 열어젖힌 반역자들도 있었다.

하지만 내게는 거절할 권리가 없었다.

그때 놋솥에서 갓 떠낸 뜨거운 국물이 그대로 내 몸을 덮쳤다. 살갗이 익어 버릴 듯한 화끈한 통증이 순식간에 번졌다.

“뭘 꾸물거리는 것이냐? 망국의 핏줄 주제에 아직도 공주 행세를 하려 들어? 목숨 하나 붙여 둔 것만도 감지덕지할 일이지. 분수도 모르고!”

나는 아픔조차 느끼지 못하는 사람처럼 조용히 발끝을 세웠다.

한때 공주였던 나는 그렇게 사람들의 흥을 돋우는 한낱 무희가 되었다.

초원의 풍속은 본래 분방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으로도 성에 차지 않는지, 이번에는 겉옷까지 벗으라며 소리 높여 부추겼다.

멀찍이서 내게 닿은 타나오윤의 눈빛은 싸늘하고 깊었다.

그는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곧 허락이나 다름없었다.

나는 입술을 깨문 채 천천히 허리끈을 풀었다.

뜨거운 국물에 덴 살과 옷자락이 엉겨 붙어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억지로 옷을 잡아당기는 순간 살점까지 뜯겨 나가며 금세 피가 배어 나왔다.

참고 있던 눈물이 끝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연회가 끝난 뒤에야 타나오윤은 짙은 술 냄새를 풍기며 내게 다가왔다.

차가운 손끝이 아직 마르지 않은 눈물 자국을 스치더니, 뺨에 맺힌 눈물을 닦아주었다.

그러나 입에서 나온 말은 한없이 매정했다.

“진하선, 지금 짐 앞에서 일부러 가련한 척이라도 하는 것이냐?”

“소인이 어찌 감히 그러겠사옵니까?”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오래된 지병이 또다시 도졌다.

나는 타나오윤의 눈앞에서 피를 토하며 연신 기침을 쏟아 냈다.

기침이 터질 때마다 속이 뒤집히고 오장육부까지 쏟아질 듯했다.

타나오윤은 더러운 것이라도 피하듯 옆으로 비켜섰다.

눈가에 어린 비웃음은 더욱 짙어졌다.

“그 골골대는 꼴을 십 년이나 보아 왔다. 아직도 병든 시늉이 지겹지도 않으냐?”

나는 한때 그가 그저 진나라의 여인들을 못마땅해하는 줄 알았다.

나처럼 병약하고 유약한 여인을 싫어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지난 세월 동안 타나오윤은 신은수에게만큼은 더없이 세심하고 다정했다.

그녀가 미간을 조금만 찌푸려도 태의가 곧장 문밖에 무릎을 꿇고 대기해야 할 정도였다.

몸속의 고충이 내 살과 장부를 갉아먹듯 날뛰기 시작했다. 온몸이 걷잡을 수 없이 떨렸고, 이마에서는 식은땀이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

정신을 잃기 직전, 타나오윤의 눈빛에 잠시 당황한 기색이 어리는 듯했다.

그는 이를 악문 채 말했다.

“진하선, 너를 그리 쉽게 죽게 두지 않을 것이다. 살아서 끝까지 네 죗값을 치러야 할 것이다!”

하지만 내게 남은 시간은 그 죗값을 다 치르기엔 너무 짧았다...

이제 이틀만 지나면, 나는 반드시 죽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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