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봄을 빼앗은 궁제1화
이 화는 약 2813자. 본 사이트에서는 제1~3화를 미리 읽을 수 있습니다.
적녀인 언니가 병으로 세상을 떠난 뒤, 나는 동궁에 들어가 태자의 첩이 되었다.
동궁에서 보낸 육 년 동안 조정겸은 나를 다정하게 대했고, 어린 황손은 친어머니처럼 따랐다.
언니를 닮은 유정월이 나타나 제 입으로 언니의 환생이라 하기 전까지는.
그때부터 모든 것이 달라졌다.
황손은 그녀를 살갑게 어마마마라 부르면서, 나를 남의 자리를 차지한 가짜라고 욕했다.
유정월이 내 뱃속 아이가 황손의 자리를 위협할까 두렵다고 하자, 조정겸은 그 한마디에 임신한 내게 낙태약을 들이부었다.
"나원아, 너는 사생아에 불과하다. 동궁에 들어온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해야지. 네 몫이 아닌 것까지 탐내지 마라."
사흘 동안 죽을 듯한 통증에 시달렸다. 침상이 피로 물들고, 이미 사람의 형체를 갖춘 딸을 잃었다.
정신을 차린 나는 망가진 몸을 이끌고 황후 앞에 무릎을 꿇었다.
"육 년이 지났습니다. 황후 마마, 이제 저와 어머니를 놓아주십시오."
* * *
전각 구석의 청동 물시계에서 똑똑 물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내 몸 아래로도 피가 그치지 않고 흘러 속바지를 붉게 적셨다.
황후는 눈시울을 붉히며 서둘러 궁녀들에게 나를 침상에 눕히라 일렀다.
"정겸이 너를 마음에 두고 있다는 건 내가 잘 안다. 지금은 잠시 눈이 멀어 이런 잘못을 저지른 게야."
"더구나 윤헌을 두고 갈 수 있겠느냐? 너를 친어미로 여기는 아이인데."
나는 핏기 하나 없는 얼굴로 침상 가장자리에 엎드렸다.
"소첩은 복이 없어 태자 전하를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황손의 어미 자리도 감히 바라지 않습니다."
"황후 마마, 공은 없어도 지난 육 년간 애쓴 정을 보아 주십시오. 죽기 전 마지막 소원만은 들어 주시기를 청합니다."
육 년 전, 막 열다섯이 된 나는 이듬해 봄을 기다렸다.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살던 노씨 집안의 젊은 장군에게 시집갈 날이었다.
그때 자신이 내 아버지라는 남자 장경문이 불쑥 나타났다. 내 이름을 장나원으로 바꾸더니, 도성으로 돌아가 가문의 딸로 살게 해 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도성에 도착하자 황후와 아버지는 어머니의 목숨을 빌미로 나를 협박했다. 나는 떠밀리듯 동궁에 들어가 봉의(奉儀: 태자의 하급 후궁)가 되었다.
병으로 세상을 떠난 적녀였던 언니가 남긴 어린 황손을 돌보라는 것이 겉으로 내세운 이유였다.
실상은 황후와 아버지가 장씨 가문의 오랜 부귀를 지키려는 수작이었다.
내가 원하는지 묻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독을 다루는 의원에게 배운 나는 몇 번이나 스스로 독을 먹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목숨을 건졌다.
결국 황후는 나와 육 년의 기한을 약속했다.
육 년 뒤, 황손이 자라면 자유롭게 놓아주겠다고.
어머니를 살리려면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동궁에 들어간 지 삼 년째 되던 해, 진안왕이 반란을 일으켰다. 나는 조정겸을 살리려 그를 향한 칼날을 대신 맞았다.
그 뒤로 겨울만 되면 가슴을 도려내는 듯한 통증에 시달렸다.
어릴 때부터 몸이 약했던 조윤헌을 위해서는 한 걸음마다 무릎을 꿇으며 삼천 계단을 올랐다. 그렇게 호은사에서 호신부를 받아 왔다.
아이의 몸을 보하려 온갖 약초를 직접 맛보기도 했다.
동궁에서 보낸 육 년. 조정겸 부자 때문에 죽을 고비를 넘긴 것만 여러 번이었다.
돌처럼 차갑던 두 사람도 내 앞에서는 마음이 누그러졌다.
내가 임신을 확인한 날, 조정겸은 나를 품에 안고 태자비로 삼겠다고 약속했다.
조윤헌은 내 무릎에 얌전히 엎드려 조금 부푼 배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어머니, 누이는 언제 저와 놀 수 있습니까?"
너무도 다정한 나날이었다. 우리가 정말 행복한 세 식구인 줄 착각할 만큼.
진국대장군이 딸을 데리고 도성에 오기 전까지는.
언니와 얼굴이 닮은 유정월. 이름난 승려는 그녀가 언니의 환생이라고 단언했다.
조정겸은 그녀를 아내로 맞겠다며 정명전 앞에 사흘이나 무릎을 꿇었다.
조윤헌은 그녀의 손을 잡고 살갑게 어마마마라 불렀다. 내게는 남의 자리를 차지한 가짜라고 욕했다.
조정겸이 약속을 저버린 것보다 더 아픈 건, 내 손으로 키운 아이가 쏟아 내는 모진 말이었다.
그제야 꿈에서 깨어난 듯 현실이 보였다.
아이를 무사히 낳아 이 감옥에서 함께 벗어나고 싶었다. 바라는 건 그것뿐이었다.
그런데 유정월이 또 무심한 듯 한마디를 던졌다.
"봉의도 장씨 가문의 딸이 아닙니까? 아이를 낳으면 황손의 자리를 위협하지 않겠습니까?"
조윤헌의 눈에 제 나이에는 어울리지 않는 살기가 어렸다.
조정겸은 홍화 탕약 한 그릇을 들고 왔다.
나는 무릎을 꿇고 이마가 터져 피가 흐르도록 머리를 조아렸다.
"전하, 소첩은 의술을 압니다. 뱃속 아이가 딸이라는 것도 진작 확인했습니다. 결코 황손의 자리를 위협하지 않을 것입니다."
조정겸은 내 말을 믿지 않았다.
유정월에게 매수된 태의가 내 배 속에 든 것은 아들이라고 하자, 그 말만 믿었다.
조정겸은 내 얼굴을 움켜쥐고 입 안으로 홍화 탕약을 들이부었다.
목소리만은 그해 처음 잠자리를 하며 나를 달래던 때처럼 부드러웠다.
"나원아, 너는 사생아에 불과하다. 동궁에 들어온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해야지. 네 몫이 아닌 것까지 탐내지 마라."
쓴 약이 목으로 넘어가자 혼까지 떨릴 만큼 아팠다.
내 몸에서 나온 아이가 딸인 것을 보고, 유정월이 아무것도 모르는 듯 커다란 눈을 깜빡였다.
"정말 딸이었습니까?"
조정겸의 눈에 무슨 감정인지 모를 것이 스쳤다. 이내 다시 다정한 목소리로 나를 달랬다.
"나원아, 우리에게는 또 아이가 생길 거야."
나는 노을빛 비단에 수놓인 석류 무늬를 바라보며 서글프게 웃었다.
"그렇겠습니까?"
황후는 무슨 말을 하려다 멈췄다. 다시 피로 젖은 이부자리를 보고서야 한숨과 함께 허락했다.
"열흘 뒤면 정월 보름 등불 축제가 열린다. 그날 밤에는 궁문 경비가 느슨할 테니, 네 어미와 함께 떠나거라."
나는 침상에 엎드려 머리를 조아리며 은혜에 감사했다.
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아니, 조정겸. 우리에게 다시 아이가 생길 일은 없어.'
세로쓰기 표시 중: 본문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스크롤합니다(← → 키로도 이동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