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영혼만 남게 된다면제1화
이 화는 약 1818자. 본 사이트에서는 제1~3화를 미리 읽을 수 있습니다.
아들이 대학 수능을 마친 날, 나는 암 말기로 병원에서 생을 마감했다.
다만 남편이란 인간은 호텔에서 첫사랑을 끌어안고 있었다.
“우리 자기 조만간 은찬의 새엄마가 될 거야.”
아들 이은찬도 바에서 술을 퍼마시면서 친구들에게 푸념해댔다.
“우리 엄마는 내 인생을 너무 공제하려고 들어. 마음 같아선 확 멀리 떠나가 버리고 싶다니까.”
또한 시어머니 한라희는 이웃들과 이런 식으로 입을 나불거렸다.
“지유 걔는 종일 하는 게 뭐야? 우리 집에 빌붙어 사는 애 차라리 없기만 못해!”
나는 그런 그들에게 일일이 반박할 수가 없었다.
이번엔 드디어 모두의 소원을 이뤄준 듯싶었다.
* * *
병원에서 암 말기로 죽은 날, 내 영혼은 도시 상공을 떠돌아다녔다.
의사는 나의 시신을 보더니 고개를 내저었다.
“가망이 없어. 가족들에게 알려.”
착잡한 전화벨 소리가 울리고 곧이어 통화가 연결됐다.
“임지유 씨 가족분 되시죠? 임지유 씨가 암 말기로 사망하셨습니다. 병원에 오셔서 시신 인수하길 부탁드립니다.”
전화기 너머로 한참 침묵이 흐른 후 차가운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화 잘못 거셨어요. 앞으로 저한테 연락하지 마세요.”
이때 의사 옆의 간호사가 의료 차트를 펼치고 날짜를 재차 확인했다.
“그럴 리 없는데... 이 번호로 적어도 세 번은 등기했거든요...”
전화가 끊긴 후 의사는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사기 전화라고 오해했을 수도 있지.”
그들은 여전히 날 위로하려 했지만 아쉽게도 침대에 누워있는 나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박약한 의지에 따라, 나의 신념에 따라 어느 호텔 방 앞에 도착하자 슬립 잠옷을 입은 여자가 이제 막 전화를 끊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스스로 위로하고 있었다.
“그년 끝내 죽었네.”
이때 나의 남편 이도진이 달랑 타올 한 장만 두른 채 뒤에서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뭐해, 자기야?”
여자는 일부러 홀가분한 척하며 답했다.
“귀신 같은 당신 와이프 전화를 받았어. 내가 대신 받았다고 원망하는 건 아니지?”
“지유한테서 전화가 왔다고?”
이도진이 미간을 찌푸렸다.
‘이 여자가 가출한 지 한참 됐는데 갑자기 웬 전화야?’
다만 그는 눈앞의 아름답고 유혹적인 여자를 바라보면서 마음속의 의문을 꾹 짓누른 채 그녀에게 덮쳐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다 늙은 아줌마랑 세련된 커리어 우먼이랑 비교할 바가 안 되니까.
하지만 이도진이 정작 잊고 있었던 게 한 가지 있는데 애초에 그가 내게 전업주부가 되어달라고 애원했었다.
“지유야, 은찬이는 지금 한창 엄마가 필요할 때니 집에서 애만 키워. 약속할게. 너랑 은찬이 평생 책임지고 보살펴줄 거야 내가.”
그토록 진지한 얼굴로 맹세를 해대니 우리 엄마마저 마음이 흔들려서 사위 대신 나를 설득했다.
그때부터 나는 무려 18년 동안이나 집안일이라는 지옥에 갇혀 살았다.
결국 사망하고 나서야 진정한 해탈을 얻은 셈이다.
나는 이도진이 내연녀를 데리고 집에 돌아오는 걸 묵묵히 지켜봐야만 했다.
시어머니 한라희가 상다리가 부러지도록 음식을 한 상 차려놓고 임신한 몸의 유이서를 반겨주었다. 이씨 일가에 손주 녀석을 안겨줄 여자이니까.
한라희가 늘 하는 말이 있는데 아이를 못 낳는 여자는 폐인이나 다름없다고 했다.
내가 난산에 출혈까지 심해져서 더는 아이를 가질 수 없게 됐을 때 이도진은 내 얼굴에 흘러내린 눈물을 닦아주면서 이렇게 말했다.
“아이는 한 명으로 족해. 괜찮아, 지유야.”
하지만 한라희가 옆에서 야유 조로 쏘아붙였다.
“고작 한 명만 낳을 거면서 뭣 하러 이 비싼 병원에 택해? 돈 아깝게!”
그때 내가 말할 기력이라도 있었다면 그들 귀에 또박또박 잘 들리게 얘기했을 것이다.
아이를 낳는 게 얼마나 아픈지, 수술대에서 얼마나 두려웠는지, 이대로 죽는 건 아닌지, 조금이라도 더 살고 싶다고 부디 살려달라고 애원하고픈 마음이 간절했다고 말이다.
세로쓰기 표시 중: 본문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스크롤합니다(← → 키로도 이동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