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 없는 결혼은 한 번이면 충분했다제3화
이 화는 약 2406자. 본 사이트에서 읽을 수 있는 3화 미리 읽기 중 마지막 화입니다. 이어지는 제4화부터는 공식 앱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임아진이 설명을 마치기도 전에 이정호는 비닐장갑을 벗었다. 만년필을 건네받아 서명란에 제 이름을 적었다.
“이렇게 바로 해도 돼? 내용은 안 봐?”
임아진은 뻔히 알면서도 묻고, 일부러 민윤희 쪽을 흘겨봤다.
이정호가 옅게 웃었다.
“우리 사이에 그런 것까지 따져야 해?”
“아진 이모, 나도 장난감 사 줘!”
이우희가 커다란 눈을 깜박였다.
“내 방을 인형으로 꽉 채우고 싶어. 엄마가 만든 건 다 못생겨서 싫단 말이야!”
“나도!”
이재준도 신이 나서 손을 들었다.
“나는 변신 로봇 피규어 백 개 놓을 거야!”
민윤희가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너희 둘 다 천식이 있어. 방에 장난감을 너무 많이 두면 목숨도 위험할 수 있어.”
임아진은 잠깐 멈칫했다가 웃었다.
“가장 안전한 소재로 골라 줄게요. 윤희 씨는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이정호도 거들었다.
“아진이 고르는 건 믿어도 돼.”
이정호의 허락이 떨어지자 이재준과 이우희는 활짝 웃으며 임아진의 양 볼에 입을 맞췄다.
“와! 아진 이모가 최고야!”
“이모가 우리 엄마였으면 좋겠다!”
이정호는 세 사람이 웃고 떠드는 내내 더없이 부드러운 눈으로 바라봤다.
민윤희에게는 그 광경이 그저 우스울 뿐이었다.
전생의 민윤희는 장난감이 아이들의 천식을 자극할까 봐 친환경 소재를 하나하나 골라 직접 만들었다. 작업 중에 손을 다치거나 까져도 아프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하지만 정성을 쏟아 만든 물건은 아이들에게 아무 가치도 없었다.
민윤희는 홀로 방으로 돌아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임아진이 이혼 조정 합의서를 들고 찾아왔다.
“정호가 서명했어요. 이제 와서 마음 바꾸지는 않겠죠?”
“물론이죠.”
민윤희의 대답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나는 법원 결정이 확정되는 날 바로 떠날 거예요.”
...
다음 날, 임아진은 두 아이를 데리고 나가 장난감을 한가득 사 왔다.
이재준과 이우희는 임아진의 뒤만 졸졸 따라다니며 들뜬 얼굴로 제 방을 꾸몄다.
복도를 지나던 민윤희는 아이들이 자신이 손수 쌓아 준 블록 성과 천으로 꿰맨 인형을 하나씩 쓰레기통에 던지는 모습을 보았다.
그때 복도에서 무거운 물건을 끄는 소리가 들렸다.
이삿짐 직원 몇 명이 새 플로어 스탠드와 화장대, 거실 탁자를 들고 들어왔다.
“아이들이랑 장난감 사러 갔다가 예쁜 가구가 보여서 같이 사 왔어.”
임아진은 입가에 미소를 띠고 이정호를 바라봤다.
“집 분위기가 너무 딱딱해. 날 잡아서 전부 새로 바꿔서 꾸미는 건 어때?”
이정호는 고민하지도 않고 답했다.
“네가 원하는 대로 해.”
민윤희의 손톱이 손바닥을 깊이 파고들었다.
이 집에 놓인 모든 것은 민윤희가 7년에 걸쳐 하나씩 정성껏 꾸민 것이었다.
이제 임아진이 ‘딱딱하다’라고 한마디한 것만으로 이 집에서 민윤희가 했던 일들은 전부 부정당했다.
이후 임아진은 인테리어 공사를 지켜봐야 한다는 핑계로 저택에 눌러앉았다.
이혼 조정 합의서를 손에 넣은 민윤희는 아예 집안일에서 손을 뗐다. 집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 더는 관여하지 않았다.
열흘이고 보름이고 집에 들어오지 않던 이정호가 매일 정해진 때에 귀가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네 사람이 좁은 주방에 모여 음식을 만들다가 간장을 사방에 흘리고도 즐겁게 웃는 모습도 보았다.
심한 결벽증이 있는 이정호에게 임아진이 씻지도 않은 딸기를 내밀자, 눈 한 번 깜박이지 않고 받아먹는 모습도 보았다.
시간에 철저한 이정호가 임아진과 아이들을 위해 새벽까지 영화를 보고 소파에서 다음 날 정오까지 잠든 탓에, 중요한 회의까지 취소하는 모습도 보았다.
민윤희는 마침내 알았다. 이정호의 까다로운 기준은 오직 민윤희에게만 적용된다는 것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이정호는 얼마든지 너그러워질 수 있었다. 다정하게 챙길 줄도 알았고, 세워 둔 원칙도 상대를 위해 깨뜨릴 수 있었다.
...
어느 깊은 밤, 민윤희의 침실 문이 거칠게 열렸다.
며칠째 말 한마디 건네지 않았던 남자가 민윤희 앞에 섰다. 차가운 분노가 눈 속에서 일렁였다.
“나도 참는 데 한계가 있어.”
이정호가 내려다보며 얼음처럼 차갑게 말했다.
영문을 몰라 하던 민윤희 앞에 이정호가 담요 한 장을 내던졌다.
“요즘 네가 집안일에 손 놓고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은 건 넘어갔어. 하지만 어떻게 그 화를 아이한테 풀 수가 있지?”
“우희가 천식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며칠째 빨지 않은 담요를 덮어줘? 우희가 죽을 뻔했어!”
민윤희는 눈을 크게 떴다. 이 담요는 2년 전, 자신이 수없이 비교한 끝에 고른 고밀도 순면 제품이었다.
고작 며칠 빨지 않았다는 이유로 천식 발작을 일으킬 리가 없었다.
“우희가 발작은 이 담요 때문일 수 없어.”
민윤희는 차갑게 맞받았다.
“차라리 임아진 씨가 사 온 장난감부터 확인해 봐.”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재준이 울며 달려왔다. 작은 몸으로 이정호의 다리를 끌어안고 목이 터져라 호소했다.
“엄마는 우리를 싫어해! 우리를 버리려고 해! 전에 납치됐을 때도 구하러 오지 않았고, 나쁜 사람한테 그냥 죽이라고 했어!”
“아빠, 엄마 내보내 줘! 엄마가 우리를 버리겠다면 우리도 엄마 필요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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