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시 그녀는 내가 난관결찰술을 받았다는 사실을 잊었어요 · 제1화설정≡

그녀는 내가 난관결찰술을 받았다는 사실을 잊었어요제1화

이 화는 약 2623자. 본 사이트에서는 제1~3화를 미리 읽을 수 있습니다.

내가 십 년 넘게 타던 구형 쏘나타를 정비소에 맡기려 했을 때였다.

대기업 대표인 아내 은수는 나를 향해 매몰찬 비난을 쏟아냈다.

"부부라면 고락을 같이해야지, 상장을 앞둔 이 중요한 시기에 왜 이렇게 속 좁게 굴어? 정말 그릇이 그것밖에 안 돼?"

"회사 자금 사정이 얼마나 빠듯한데 그 똥차 고치는 데 돈을 낭비해? 공유 자전거 타고 출근한다고 죽기라도 하니?"

하지만 바로 다음 날인 밸런타인데이, 그녀는 새로 뽑은 어린 기사에게 최고급 사양의 롤스로이스를 선물했다.

두 사람이 그 은밀한 공간 안에서 서로에게 취해 엉켜 있는 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손에 쥐고 있던 수십억 원 상당의 고급 수입차 인수 영수증을 소리 없이 구겨뜨렸다.

10년 동안 고생을 같이한 결과가 고작 이런 조롱거리라니.

그렇다면 이 무대 위의 광대는 기꺼이 그들의 연극에서 퇴장해 주겠다.

* * *

"은수 누나, 이렇게 비싼 선물을 주시면 서 본부장님이 싫어하시지 않을까요?"

새로 채용된 전담 기사 태오가 조심스레 은수의 손에서 차 키를 건네받으며 말했다. 앳되고 잘생긴 얼굴에 걱정스러운 기색이 스쳤다.

은수는 그 말을 듣자마자 미간을 찌푸리며 날카로운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내가 결정한 일에 그 사람이 감가상각을 따지며 참견할 권리 따윈 없어!"

그녀는 태오의 손을 이끌고 갓 출고된 롤스로이스로 들어가 차량의 여러 기능을 다정하게 설명해 주었다.

그녀가 참견할 권리조차 없다고 치부해 버린 당사자인 나는, 겨우 몇 미터 떨어진 곳에 묵묵히 서서 두 사람의 거리가 점점 좁혀지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꽉 쥔 주먹에 힘이 들어가 마디가 하얗게 질렸고, 손에 들고 있던 고급 차 청구서는 이미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짓겨졌다.

은수는 무언가 느꼈는지 고개를 돌려 나와 눈을 마주쳤다.

그녀의 얼굴이 순식간에 차갑게 굳어졌다. 차 문을 열고 빠른 걸음으로 다가온 그녀는 눈을 치켜뜨며 다짜고짜 소리를 질렀다.

"서윤재, 그 썩은 표정은 뭐야? 오늘 제일 중요한 유통사 바이어랑 미팅 있는 거 몰라? 왜 여기서 미적거리면서 훼방을 놓는 건데!"

나는 대꾸하지 않고 반짝이는 새 차와 그 안에서 내리는 젊은 남자를 가만히 응시했다.

태오는 은수가 사준 명품 수트를 입고 있었다. 저 차림의 어디가 운전기사란 말인가.

시선을 아래로 내려 내 행색을 보았다. 내가 입은 옷들은 은수가 대형마트 가판대에서 대충 집어온 몇만 원짜리 싸구려 셔츠가 전부였다.

태오가 안절부절못하는 걸음걸이로 다가와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본부장님, 다 제 잘못이에요. 화 풀으세요. 제가 이렇게 과분한 선물을 받는 게 아니었는데…… 전 미천한 출신이라 이런 좋은 물건은 어울리지 않아요."

하지만 은수의 시선이 닿지 않는 내 쪽을 향해, 그의 눈빛은 조소와 도발로 가득 차 있었다.

은수는 그의 가냘픈 목소리를 듣자마자 얼굴을 붉히며 내 눈앞에 손가락질을 해댔다.

"속 좁은 인간 같으니라고. 내 돈으로 태오한테 선물 하나 해준 게 너랑 무슨 상관이야? 미팅 몇 개 따냈다고 유세 부리는 거야? 태오는 그저 아직 젊고 경험이 부족할 뿐이지, 역량은 너보다 만 배는 나아. 난 기꺼이 투자할 테니까 참견 마."

마치 어린 새끼를 품는 어미 닭처럼 태오를 제 등 뒤로 감싸 안는 그녀를 보며, 나는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손목시계를 보니 미팅까지 남은 시간은 단 한 시간뿐이었다.

그녀와 감정을 소모할 시간 따위는 없었다. 나는 구겨진 청구서를 그녀의 발밑에 던져버리고, 옆 주차 칸에 세워진 흰색 쏘나타로 발걸음을 옮겼다.

보름 전부터 시동이 자꾸 꺼지던 차였다. 은수에게 정비소에 맡겨야겠다고 말했을 때 그녀는 단칼에 거절했었다.

그러면서 뒤로는 새로 들어온 젊은 기사를 위해 수억 원을 아낌없이 쓰고, 소유권까지 그의 명의로 이전해 주었다.

운전석에 앉아 키를 세차게 돌렸지만, 엔진은 쿨럭이는 소리만 낼 뿐 반응이 없었다.

출시된 지 20년이 다 되어가는 낡은 고철 덩어리는 완전히 숨을 거두어 버렸다.

시간이 촉박해지자 나는 어쩔 수 없이 차에서 내려 롤스로이스의 창문을 두드렸다.

창문이 내려가며 은수의 신경질적인 얼굴이 나타났다.

"또 왜 이래? 진짜 짜증 나게!"

나는 차분하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차가 고장 났어. 오늘 아침 미팅은 회사 사활이 걸린 일이야. 같이 타고……"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은수는 문을 걸어 잠그며 소리쳤.

"안 돼! 택시 타고 가!"

"여기 외곽이라 택시 안 잡히는 거 알잖아. 바이어가 곧 도착해. 타게 해줘!"

대치 상황이 이어지자 태오가 차 문을 열고 은수를 향해 애처로운 눈빛을 보냈다.

"은수 누나, 회사 일이 우선이잖아요. 전 누나가 저만을 위해 준비해 준 전용 차라는 걸 마음속으로 아는 것만으로도 충분해요. 전 괜찮아요."

그 말에 은수가 나를 바라보는 눈빛은 한층 더 혐오스럽게 변했다.

내가 문을 열고 타려던 찰나, 태오가 짧은 비명을 지르며 손목을 감싸 쥐었다.

은수는 깜짝 놀라며 그에게 밀착했다.

"태오야, 왜 그래? 어디 아파?"

태오는 창백해진 얼굴로 아랫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누나. 요즘 운전을 너무 오래 해서 그런지 손목이 좀 시큰거려서요. 참을 수 있어요."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은수는 나를 운전석 쪽으로 거칠게 밀쳐냈다.

"네가 운전해!"

갑작스러운 힘에 중심을 잃고 비틀거리며 넘어질 뻔했다.

은수는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한번 나를 억척스럽게 밀치며 윽박질렀다.

"빨리 안 움직여? 바이어 곧 도착한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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