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끝자락에서 깨달은 것제2화
이 화는 약 4527자. 본 사이트에서는 제1~3화를 미리 읽을 수 있습니다.
탁—
발치에 폭신한 무언가 떨어지는 순간, 최수빈은 화들짝 놀라며 정신을 차렸다.
당황한 얼굴로 고개를 숙여 보니 푸른 크림이 덕지덕지 발린 케이크가 보였다.
“엄마, 엄마가 만들어준 생일 케이크 싫다니까요!”
주시후의 불만 가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고개를 들어 최수빈을 바라보았다.
“못생기고 맛도 없다고요. 제 말 못 알아듣겠어요?”
‘이건...’
최수빈은 헛숨을 들이켰다.
‘설마,다시...? 내가 정말 돌아온 거야?’
그녀는 1년 전 주시후의 생일 파티 때로 돌아왔다.
주시후는 여전히 투덜거렸다.
“저는 하린 이모가 만들어준 케이크를 먹을래요!”
“엄마, 예린이는 엄마가 해준 케이크가 맛있어요. 시후가 안 먹으면 예린이 혼자 먹을게요.”
딸의 앳된 목소리를 다시 듣는 순간, 최수빈은 고개를 숙여 아이의 야윈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차오른 눈물 때문에 시야가 흐릿해졌다.
최수빈은 쭈그리고 앉아 딸의 작은 얼굴을 조심스럽게 받쳐 들었다. 따뜻한 온기가 전해지자 그제야 자신이 1년 전으로 돌아왔다는 게 실감이 났다.
이번 생에는 절대 딸이 그 어떤 상처도 받지 않게 할 것이다.
주예린은 주시후를 바라보았다.
“엄마한테 그런 말을 하면 안 돼. 엄마가 앞으로는 네게 케이크를 해주지 않을지도 모르는데 무섭지 않아?”
“먹으려면 너 혼자 먹어. 난 그딴 거 싫어.”
주시후는 상관없다는 듯이 말한 뒤 박하린의 손을 잡았다.
“난 하린 이모가 내 엄마가 되게 할 거야. 하린 이모는 나한테 맛있는 것도 많이 해주고 승마랑 암벽등반도 같이 해줬어. 하지만 엄마는 기마술이 뭔지도 몰라. 정말 창피해. 그리고 아빠도 하린 이모를 좋아하고 나도 하린 이모를 좋아해!”
주민혁은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가죽 재킷을 입은 박하린은 당당하게 웃었다.
그녀는 아주 친한 친구처럼 왼손으로 주민혁의 어깨를 감싸면서 다른 손으로는 주시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네 아빠의 아내가 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야. 나랑 네 아빠는 생사를 함께한 적이 있는 친구야. 그리고 시후야, 이모가 말했잖아. 엄마한테 그런 식으로 말하면 안 된다고. 이제 이모 말을 안 듣는 거야?”
주시후는 입을 비죽이면서 박하린 쪽으로 다가갔다. 그는 최수빈이 준 생일 선물을 바닥에 내팽개쳤다.
“하지만 엄마는 저한테 이렇게 값싼 만년필을 생일 선물로 준걸요. 심지어 장난감은 안 사줬어요. 반대로 하린 이모는 제게 직접 만든 비행기 모형을 선물로 줬어요. 심지어 그건 진짜 날 수도 있잖아요. 엄마가 준 생일 선물보다 훨씬 더 멋지다고요!”
주민혁이 그랬다. 앞으로 박하린은 비행기를 설계할 거라고, 그리고 앞으로 박하린이 설계한 비행기에 탈 수도 있을 거라고 말이다. 너무 멋졌다.
반대로 최수빈은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촌스러운 사람이었다.
최수빈은 자신이 키운 아이가 박하린의 편을 드는 것을 보니 웃음이 나올 것만 같았다.
왜 예전에는 이런 것들을 인지하지 못했던 걸까?
주시후는 박하린의 친아들이기 때문에 박하린과 가까이 지내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주시후가 박하린이 자신의 친모라는 걸 모른다고 해도 말이다.
지난 생에 최수빈은 주민혁의 환심을 사려고 주시후를 친아들처럼 여겼다.
그리고 모두가 그걸 당연하게 여겼다.
그러나 최수빈은 더 이상 주예린과 함께 그런 수모를 견딜 생각이 없었다.
최수빈은 바닥에 떨어진 만년필을 주었다. 엷은 미소를 짓는 그녀의 얼굴에서는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하린 씨는 아이들과 정말 잘 놀아주네요. 그러면 앞으로 시후와 주민혁 씨는 하린 씨에게 부탁할게요.”
박하린은 당황했다. 그녀는 최수빈이 그렇게 말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눈치였다. 최수빈은 화를 내지도, 그녀와 싸우지도 않았다. 그리고 비굴하지도, 나약하지도 않았다.
최수빈은 그저 한없이 평온한 미소를 짓고 있을 뿐이었다.
박하린은 주민혁을 바라보았다.
“민혁 오빠, 내 말 때문에 언니가 오해한 건 아닐까? 난 아무 말도 안 할게. 내가 괜한 소리를 했나 봐.”
주민혁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면서 최수빈을 바라보았다.
“나이도 많으면서 왜 아이처럼 유치하게 굴어? 그런 말 함부로 하는 거 아니야.”
주민혁은 티가 나게 박하린을 감싸고 들었다. 그는 최수빈이 자신의 체면을 고려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최수빈은 주민혁의 시선을 마주했다. 그는 한결같이 매정하고 쌀쌀맞았으며,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티 나게 박하린의 편을 들어주며 최수빈에게 망신을 주었다.
그가 그럴 수 있는 이유는 최수빈이 자신을 떠나지 않을 거라는 걸 확신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모든 걸 당연하게 생각했다.
이번 생의 최수빈은 지난 생처럼 딸이 아빠와 함께 생일을 보낼 수 있게 해주려고 수모를 견디면서 억지웃음을 지어 보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 생일 파티에 끝까지 남아있지도 않을 것이다.
새로운 삶을 누리게 되었는데 지난 생처럼 똑같이 멍청한 짓을 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딸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고 싶었고 다른 사람들이 갖고 있는 건 주예린에게도 똑같이 해주고 싶었다.
최수빈은 무심하게 시선을 옮긴 뒤 딸의 손을 잡았다.
“예린아, 가자. 엄마랑 같이 생일 파티 하러.”
이번 생에 최수빈은 주예린이 다른 사람들에게 경멸당하거나 괴롭힘당하는 걸 절대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주예린은 주민혁을 힐끗 보더니 결국 엄마의 손을 잡고 자리를 뜨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몇 걸음 걷지 않았는데 직원이 그들을 막았다.
“대표님께서 주시후 도련님의 생일 파티가 끝날 때까지 아무도 자리를 뜰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최수빈은 가라앉은 기분으로 자신을 막아선 직원을 바라보았다.
주민혁이 주시후를 얼마나 끔찍이 여겼으면 다들 주시후가 주민혁의 친아들이고 주예린은 사생아라고 여겼다.
주시후의 생일에 주민혁은 다른 사람들이 파티장을 먼저 떠나는 것조차 용납하지 않았다.
주민혁은 오늘이 주예린의 생일날이기도 하다는 걸 까맣게 잊어버렸을지도 모른다.
그가 과연 기억할까?
주예린을 낳을 때 최수빈은 난산으로 주예린과 함께 저세상으로 갈 뻔했는데 당시 주민혁은 박하린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그는 박하린에게 다른 가족이 없어서 자신이 챙겨줘야 한다는 허울 좋은 핑계를 댔고 박하린은 아이를 낳자마자 자신의 커리어를 위해 해외 연수를 떠났다.
금융공학과 항공우주공학 석사 복수 학위를 취득하고 귀국한 박하린에게 수많은 기업들이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박하린은 그중 마음에 드는 곳이 없었는지 은산시의 항공기 연구원인 511 연구원의 항공기 설계에 참여하고 싶어 했다. 511 연구원은 채용 기준이 상당히 엄격했기에 주민혁은 박하린이 511 연구원에 들어갈 수 있게끔 힘을 썼다.
지난 생에 최수빈은 그러한 것들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는 오로지 주민혁에게만 신경을 썼기에 박하린의 커리어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렇게 최수빈은 한심하게도 5년간 박하린을 대신하여 아이를 키웠고, 아이와 남편을 위해 자신의 미래를 포기하면서까지 조강지처로 살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으로 멍청했다.
최수빈은 입꼬리를 올리며 차갑게 웃었다.
“주 대표님의 명령이 있다고 해서 제 자유를 제한하면 되죠.”
예전에 최수빈은 주민혁을 깊이 사랑했기에 기꺼이 주민혁의 아내로 살았다.
그러나 새로운 삶을 얻게 된 지금 그녀는 더 이상 주민혁 곁의 별 볼 일 없는 비서로 살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다시 원래 업계로 돌아가 딸을 데리고 멋지게 살 것이다.
주민혁의 안색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고 그의 기운 또한 차가워졌다.
최수빈은 속으로 냉소를 흘렸다.
아마 주민혁도 의아할 것이다. 늘 자신의 말에 고분고분 따랐던 순종적인 아내가 갑자기 사람들 앞에서 그의 말을 거역하니 말이다. 그가 화를 내는 것도 정상이었다.
그러나 최수빈은 더 이상 늘 당연하다는 듯이 희생을 감수하는 아내가 되지 않을 것이다.
이내 최수빈은 결혼반지를 빼서 바닥에 내팽개쳤고 결혼반지는 매끄러운 바닥에서 몇 번 튀어 올랐다.
금속이 부딪치는 소리에 근처에 있던 사람들 모두 헛숨을 들이켰다.
“주민혁 씨, 우리 이혼해요. 시후는 당신이 키우고 예린이는 내가 키울게요. 그리고 이혼 합의서는 내일 아침 당신 사무실로 보낼게요.”
주시후와 박하린이 그렇게 좋다면 이번 생에는 세 사람이 함께 살 수 있도록 그들의 인생에서 빠져줄 것이다.
최수빈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일을 벌이자 주민혁은 난감해졌다.
그는 어두운 눈빛으로 최수빈을 응시했다.
“최수빈, 언제까지 이렇게 심술부릴 거야? 예린이는 아직 어려. 이렇게 사소한 일로 이혼한다는 게 말이 돼?”
최수빈을 사랑하지 않는 주민혁에게 있어 최수빈의 모든 행동은 심술을 부리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최수빈은 똑같은 실수를 저지르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더 이상 딸과 함께 매정한 주민혁의 언행에 상처받으며 살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양아들인 주시후를 키우고 싶지도 않았다.
주민혁과 주시후 둘 다 버릴 것이다.
“네.”
최수빈은 싸늘한 눈빛으로 경호원을 바라보았다.
“비켜요.”
상황을 파악한 경호원은 당황스러워하며 길을 내주었다. 그는 더 이상 최수빈을 막지 않았다.
최수빈이 주예린의 손을 잡고 미련 없이 떠나는 뒷모습을 본 주민혁은 안색이 매우 나빴다.
“언니 혹시 우리 사이를 오해한 건 아닐까?”
박하린이 말했다.
“내가 해명할게. 오늘 일 쉽게 생각하지 마. 여자는 화가 나면 정말 가차 없어지니까.”
박하린은 그렇게 말하더니 초조한 얼굴로 최수빈을 붙잡으려고 했다.
“해명할 필요 없어.”
주민혁이 차갑게 입을 열었다.
“최수빈이 나랑 이혼할 리가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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