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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바람이 지나간 자리제1화

이 화는 약 3148자. 본 사이트에서는 제1~3화를 미리 읽을 수 있습니다.

장수에게 가장 걸맞은 최후는 전장에서 맞는 죽음이라 했다.

소은하는 죽었다.

천 리 밖 북방 변경의 전장에서, 온몸에 화살을 맞은 채.

붉은 술을 단 창을 손에 쥔 소은하는 피투성이가 된 채 땅에 무릎을 꿇었다. 흐려지는 시야 너머 마지막으로 눈에 들어온 것은 멀리 펄럭이는 군기와, 그 위에 새겨진 커다란 ‘소(蘇)’ 자였다.

‘나현진은 무사히 대주국으로 돌아갔겠지?’

‘이건... 그대가 바라던 대로 제국으로 출병해 나현진을 되찾았으니...’

‘이제 그대는... 더없이 기쁘겠구나.’

* * *

백전백승을 자랑하던 여장군이 끝내 전장에서 쓰러졌다.

소은하는 조용히 두 눈을 감았다.

귓가를 가득 메우던 함성과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점차 멀어지더니, 이내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이윽고 모든 것이 깊은 어둠 속으로 가라앉았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소은하는 자신이 극락에 들었거나, 아니면 지옥에 떨어졌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다시 눈을 뜬 순간, 눈앞에 펼쳐진 것은 뜻밖에도 황궁이었다.

소은하는 멍하니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희미하게 비치는 신체 너머로 바닥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이윽고 고개를 들자, 책상 앞에 곤용포를 입은 이건이 보였다.

‘혹 죽기 전에 헛것이라도 보이는 건가?’

이건은 책상에 엎드린 채 잠들어 있었다. 상소문을 살피다 저도 모르게 잠이 든 듯했다.

소은하는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그의 옆모습을 바라보다 무심코 손을 뻗었다.

하지만 손끝이 닿기도 전에 이건이 번뜩 눈을 떴다.

매서운 시선이 곧장 소은하를 향했다.

순간 그녀는 이건이 자신을 발견한 줄 알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하지만 이건은 그저 미간을 살짝 찌푸렸을 뿐, 곧바로 시선을 거두고 몸을 일으켰다.

“급보이옵니다!”

그때 전각 밖에서 궁인이 큰소리로 아뢰었다.

이건은 손끝으로 미간을 짚으며 낮게 말했다.

“들라.”

곧이어 급보를 든 금군 한 명이 황급히 들어와 무릎을 꿇었다.

“폐하께 아뢰옵니다! 전장에서 대승을 거두었사옵니다! 소 장군께서는 적의 성 세 곳을 잇달아 함락하고 현진 아씨를 무사히 구해 내셨사옵니다. 이후 군사를 붙여 현진 아씨를 먼저 도성으로 돌려보내셨고, 아씨께서는 지금 궁문 밖에 당도해 계시옵니다. 다만 소 장군께서는...”

금군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이건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지금 현진이가 돌아왔단 말이냐?!”

더는 들을 것도 없다는 듯, 이건은 기쁨이 역력한 얼굴로 곧장 문밖을 향했다.

“짐이 직접 나가 맞이하겠다.”

금군은 다급히 뒷말을 이으려 했으나, 이건은 이미 전각을 나서고 없었다. 남겨진 그는 난감한 얼굴로 멀어지는 이건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소은하는 씁쓸하게 웃었다.

그녀는 금군이 무슨 말을 하려 했는지 알고 있었다.

지난 전투에서 나현진을 되찾기 위해 싸우다 적군의 칼을 세 번이나 맞았다는 이야기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알지 못했다.

그런 소식은 이건에게 있어 아무 의미도 없다는 것을.

그가 마음에 두는 사람은 오직 나현진뿐이었다.

이윽고 투명하게 비치던 소은하의 몸이 제 뜻과는 상관없이 이건의 뒤를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제야 소은하는 깨달았다.

눈앞의 광경은 죽기 직전 본 환영이 아니었다.

자신은 정말 죽었다.

죽은 뒤 혼백이 되어 도성으로 돌아왔고, 어찌 된 영문인지 이건의 곁에 묶인 채 떠날 수 없게 된 것이었다.

소은하는 속절없이 그의 뒤를 따라 허공을 떠돌았다.

이것이 죽은 자신에게 내려진 보상인지, 아니면 또 다른 형벌인지 알 수 없었다.

살아 있는 동안에도 십수 년을 이건과 얽혀 살았다.

그런데 죽어서까지 그에게서 벗어나지 못하다니.

소은하는 무장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소씨 가문의 공이 지나치게 커지자 선황은 그들을 경계했고, 일곱 살에 불과한 소은하를 황자의 배동이라는 명목으로 궁에 들였다.

실상은 볼모나 다름없었다.

그 무렵 이건은 황궁에서 누구의 총애도 받지 못하는 천덕꾸러기 황자였다.

냉궁에서 자라던 어린 시절, 두 사람에게 의지할 이는 서로뿐이었다.

살을 에는 찬바람이 스며드는 방에서 서로를 끌어안고 긴 겨울밤을 견뎠고, 눈보라가 몰아치는 날에는 나란히 무릎을 꿇고 벌을 받았다. 끼니를 거르는 날이면 가까스로 구한 밤떡 한 조각마저 둘이 반으로 나누어 먹었다...

그때 이건은 늘 말했다.

언젠가 자신이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르면, 그때는 지키고 싶은 사람 하나쯤은 제 힘으로 지킬 수 있을 것이라고.

그리고 그녀에게 이렇게 약조했다.

“은하야, 그날이 오면 내가 평생 너를 지켜 주마.”

소은하는 그 말을 믿었다.

그래서 한낱 버려진 황자였던 이건의 곁을 지키며 피비린내 나는 싸움을 함께 헤쳐 나갔고, 마침내 그가 황위에 오르는 날까지 함께했다.

하지만 황위에 오른 이건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제국에 군사를 보내 나현진을 되찾는 것이었다.

나현진은 승상의 여식이었다.

삼 년 전 화친(和親)의 명목으로 제국에 시집갔다.

다만 제국의 태자는 잔혹하기로 이름난 자였다. 해서 나현진이 그곳에서 모진 고초를 겪고 있다는 풍문이 끊이지 않았다.

그제야 소은하는 비로소 깨달았다.

십수 년을 함께해 온 이 사내가 정작 가슴 깊이 품고 있던 여인은 따로 있었다.

그 사람은 다름 아닌 나현진이었다.

어느새 궁문이 눈앞에 다가왔다.

한 나라의 황제인 이건이 몸소 궁문 앞까지 나와 나현진을 기다리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가마 한 채가 그의 앞에 멈추었다.

나현진은 궁녀의 부축을 받으며 가마에서 내려왔다.

이건을 본 순간, 그녀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어렸다.

“소, 소인, 폐하를 뵈옵니다.”

이건은 나현진에게서 좀처럼 눈을 떼지 못했다.

주위의 신하와 궁인들은 하나같이 머리를 조아리고 있어, 아무도 감히 그의 표정을 살피지 못했다.

그러나 이미 죽은 소은하만은 그의 눈빛을 고스란히 볼 수 있었다.

문득 오래전, 이건이 처음 나현진을 보았던 날이 떠올랐다.

그때도 저런 눈빛이었다.

다만 당시에는 힘없는 황자였기에, 나현진을 바라보면서도 애써 마음을 감추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황제가 된 이건은 더 이상 숨길 생각이 없어 보였다.

돌이켜 보니 그때 그가 마음을 내색하지 않은 것도, 나현진이 놀랄까 염려했기 때문이었다.

소은하는 그제야 깨달았다.

이건은 나현진을 처음 본 순간부터 이미 마음에 품고 있었다.

“고생이 많았다. 짐이 직접 데려다주마.”

이건이 손을 내밀어 나현진을 부축하자, 나현진조차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이건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그녀의 손을 잡았다.

소은하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러다 문득 생각했다.

‘나현진을 되찾으려다 내가 전장에서 죽었다는 걸 알게 된다면, 이건은 과연 어떤 표정을 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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