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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하지 못한 인연제2화

이 화는 약 3254자. 본 사이트에서는 제1~3화를 미리 읽을 수 있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박지영은 얼음장 속에 내던져진 듯 온몸이 싸늘하게 굳었다.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

결국 김동건에게는 조예진만 기쁘다면 자신의 목숨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것이었다.

이 사람이 바로 자신의 지아비였다.

이토록 자신을 속여 마음까지 내어 주게 만들어 놓고, 정작 그의 마음속에는 처음부터 조예진밖에 없었다!

박지영은 이를 악물고 버텼지만, 가슴 깊은 곳에서 밀려드는 절망과 고통만큼은 끝내 눌러 참지 못했다.

소리를 들은 김동건이 황급히 몸을 돌렸다.

그의 얼굴에는 어느새 걱정이 가득 어려 있었다.

“지영아, 이제 정신이 드느냐? 미안하구나. 내가 너무 늦었다. 약효가 좋은 금창약(金瘡藥)을 발라 두었으니 당분간 푹 쉬거라. 며칠 지나면 한결 나아질 것이다.”

김동건의 눈빛에 넘칠 듯 어린 안타까움을 보는 순간, 박지영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한 이불을 덮고 살아온 사람이 이토록 태연하게 자신을 속여 왔다는 사실이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마음은 이미 참담할 대로 참담해져, 더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그를 마주할 기력조차 없었다.

박지영은 아무 말 없이 시선을 돌렸다.

김동건은 직접 수건을 적셔 그녀의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 주었다. 이어 탕약까지 가져와 한 숟갈씩 떠먹였다.

그 뒤로 이틀 동안은 한시도 침상 곁을 떠나지 않았다. 밤낮으로 자리를 지킨 탓에 두 눈이 벌겋게 충혈될 정도였다.

박지영의 상처에 딱지가 앉은 것을 확인하고서야, 김동건은 그동안 밀린 공무를 처리하러 갔다.

그가 자리를 비우자 박지영은 통증을 참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자신의 옷과 장신구를 하나씩 꺼내 모두 없애 버렸다.

뒤이어 서찰을 정리하려 서재로 향했다가, 우연히 숨겨진 비밀 장치를 건드렸다.

사락사락 무언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리더니, 벽 한쪽에 느닷없이 문 하나가 나타났다.

박지영은 한참을 망설이다가 촛불 하나를 밝혀 들고 안으로 들어섰다.

비좁은 비밀 통로를 지나 밀실에 들어선 순간, 그녀는 그 자리에 굳어 버렸다.

벽마다 조예진의 초상화가 가득 걸려 있었다.

차를 마시며 옅게 웃는 모습, 말 위에서 당당히 바람을 가르는 모습, 춤사위를 펼치는 고운 자태도 있었다...

김동건은 그 모든 모습을 한 획 한 획 정성스럽게 그려 두었다. 살아 숨 쉬는 사람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했다.

또한 탁자 위에는 수백 통에 달하는 서찰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그리고 모든 서찰의 끝에는 같은 글귀가 적혀 있었다.

[예진 낭자에게.]

종이마다 영원히 마음이 변치 않으리라는 맹세와, 다음 생에서도 다시 만나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이 빼곡했다. 글자마다 스민 깊은 연정을 읽어 내려가던 박지영의 몸이 문득 휘청였다.

그제야 모든 것이 이해되었다.

어찌하여 김동건의 서재에는 매일 밤늦도록 불이 꺼지지 않았는지.

그는 책을 읽거나 글씨를 익히던 것이 아니었다.

조예진의 초상화를 바라보며 그리움을 달래고, 차마 저하지 못할 마음을 서찰에 쏟아내고 있었던 것이다.

박지영은 한동안 멍하니 서 있다가 힘없이 휘청이는 걸음으로 그곳을 빠져나왔다.

밀실의 문이 막 닫히려던 순간, 서재 문이 벌컥 열렸다.

이윽고 김동건이 들어섰다.

박지영의 모습을 본 김동건은 순식간에 낯빛이 변했다.

그는 성큼 다가와 박지영을 거칠게 붙잡은 뒤 서재 밖으로 끌고 나갔다.

“내 허락도 없이 어찌 함부로 서재에 들어온 것이냐?”

강하게 붙잡힌 손목에서 아직 아물지 않은 상처가 다시 터졌다. 곧바로 붉은 피가 배어 나왔다.

박지영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소첩은 그저 제 물건을 가지러 왔을 뿐이온데, 어찌 서재에는 들어오면 아니 되는 것입니까?”

그는 곧바로 손을 놓고 박지영의 손목에 맺힌 피를 닦아 냈다. 이내 상처에 약을 발라 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변명했다.

“그럴 리가 있겠느냐. 다만 서재에 조정에 올릴 상소문이 많아 혹여 뒤섞일까 염려했을 뿐이다. 부인은 우선 몸부터 추스르도록 해라. 필요한 것이 있으면 내게 말하면 된다.”

얼마 지나지 않아 김동건은 박지영의 말대로, 자신이 변방에 머물 때 그녀가 보내 왔던 서찰을 모두 가져다주었다.

그는 박지영이 갑자기 그것들을 왜 찾는지 물으려 했다.

하지만 그때 궁에서 사람이 찾아왔다.

조예진이 보낸 궁녀를 본 순간, 김동건은 서둘러 장군부를 떠났다.

박지영은 멀어져 가는 그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손에 든 서찰을 모두 화로 속에 던져 넣었다.

불길이 종이를 삼키며 글씨를 하나씩 지워 갔다.

십여 일이 지나면 자신 또한 이 종이장처럼 사라질 것이다.

한 줌의 재조차 남기지 않고, 이 세상에서 흔적도 없이.

김동건은 해가 저물 무렵에야 돌아왔다.

김동건은 촉수(蜀繡)가 정교하게 놓인 새 옷 한 벌을 들고 박지영의 처소로 찾아왔다. 얼굴에는 다정한 미소가 어려 있었다.

“지영아, 요 며칠 마음이 편치 않아 보이더구나. 오늘 밤 도성에서 등불놀이가 열린다는데, 나와 함께 나가 바람이라도 쐬는 것이 어떠냐?”

박지영은 내키지 않았다.

하지만 김동건에게 이끌려 결국 장군부를 나섰다.

대보름을 맞은 거리는 형형색색의 등불로 환했고, 사람들로 발 디딜 틈조차 없었다.

김동건은 길을 걷다 멈추기를 거듭하며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사들였다.

토끼 모양 연등부터 비녀와 옥잠, 연지와 분, 떡과 과자까지.

뒤따르는 하인 대여섯 명의 두 손이 모자랄 정도였다.

장사꾼들은 연신 싱글벙글 웃으며 두 사람을 놀렸다.

“마님, 나으리께서 참으로 마님을 귀히 여기시는 모양입니다. 이것들이 어디 한두 푼 하는 물건들입니까?”

“나으리께서 이리 많이 사 주셨는데, 마님께서는 나으리께 드릴 신발이나 버선이라도 골라 보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주변에서 짓궂게 말을 건넸지만, 박지영의 표정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그저 담담하게 괜찮다고 한마디 했을 뿐이었다.

순간 김동건은 잠시 멈칫했다.

그제야 그는 박지영이 오늘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사지 않았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예전의 박지영은 저잣거리에 나올 때마다 그에게 어울릴 옷이며 관모, 장신구를 정성껏 골라 주곤 했다. 괜찮은 칼이나 쓸 만한 병장기라도 눈에 띄면 빠뜨리지 않고 사서 선물했다.

김동건은 그녀가 왜 달라졌는지 알지 못했다.

그저 요즘 들어 마음이 상해 그러는 것이라 여기고 달래 주려던 찰나였다.

맞은편에서 동궁의 마차가 빠른 속도로 다가왔다.

장군부 사람들을 알아본 마부가 갑자기 채찍을 거칠게 내리쳤다.

놀란 말이 앞발을 치켜들며 날뛰더니 그대로 박지영을 향해 돌진했다.

미처 피할 틈이 없었다.

박지영은 발목을 접질리며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발목을 파고드는 극심한 통증에 눈가가 금세 젖어 들었다.

이를 악물고 고통을 참으며 고개를 들자, 요염한 미소를 띤 조예진이 오만한 눈빛으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천한 것이 제 분수도 모르고 감히 태자비마마의 행차를 막다니! 여봐라, 채찍 서른 대를 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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